김일성이 가짜라는 박갑동과 이기건의 결정적 증언 김일성의 마적행각

혜산사건(惠山事件) 관련 기록 : 판결문(1941), 사상휘보(1939) 등 : 박금철, 박달, 권영벽 등 판결문


박갑동 : 이현상의 김일성과 박헌영에 대한 평가 : 박갑동, 내가 아는 박헌영 - 중앙일보 1973년 연재물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 씨 사상편력회상기 - 중앙일보 1989~1990 연재물

박금철(朴金喆) 6.25 때 군 총치국 부국장


1962년 중국 방문 당시 박금철과 주은래(朴金喆与周恩来)

1962年6月28日,周恩来会见朝鲜最高人民会议代表团团长朴金喆、副团长康良煜、
朴信德和代表团全体成员。图为会见时合影。前排左起第7人是朴金喆、第9人
http://blog.naver.com/arg3906?Redirect=Log&logNo=140150317371

갑산파(甲山派)의 핵심인물 박금철(朴金喆, 1912~1967 ?)은 1937년 6월 4일 밤에 일어난 김일성의 보천보 습격 사건에 협력했던 사람으로, 보천보 김일성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다. 그가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김일성과 다른 인물이라 했다고 박갑동(朴甲東, 1919~ )은 증언한다. 이러한 말은 박갑동의 아래 저서에 나와 있다. 

(박갑동 연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843) <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62) : 박갑동 중앙일보 1973.09.08 종합 5면
- 박금철의 김일성이 가짜라는 증언 처음 나옴.
    이러한 때에 군대에 정치훈련을 시키기 위하여 박헌영이 군복을 입고 전선에 나타나게 되었다. 박헌영이 자기 손으로 인민군대 안에 총 정치국을 창설, 총 정치국장에 취임하고 인민군 중장의 군복을 입었었다. 박헌영의 밑에 박금철이가 부국장이 되어 인민군 소장의 군복을 입고 나섰다. 박금철은 다 알다시피 1937년 보천보 습격사건 때 박달과 함께 보천보의 지도를 그려서 압록강을 건너온 김일성에게 제공하여 성공하게 한 공로자로 선전된 자이다.
    박금철은 그 사건 때문에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을 살다가 8·15해방 때 석방되었었다. 해방 후 박금철은 박달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보천보 습격당시 김일성을 만나려고 김일성을 찾아갔었다. 가서 만나 보니 이름은 같은 김일성이라도 사람은 달라서 서로 모르는 사람이었다. 박금철은 실망하여 평양에서 취직도 되지 않고 하여 할 수 없이 자강도 강계에까지 가서 강계시 당에서 일을 하다가 시의 조직부장이 되었었다. 동란이 일어나자 군의 문화부 장교가 되었다가 박헌영이 군의 총 정치국장이 되자 박금철을 뽑아다가 부국장을 시켰던 것이다.
    뒤에 박금철이 당 중앙간부부장 시대에「박헌영·이승엽 간첩사건」이 발생되었었다. 그는 김일성 정권에 반발하여 떨어져 나가는 남로당원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당 부위원장의 지위까지 올라갔으나 드디어 김일성의 손에 의하여 이효순과 같이 숙청 당하고 말았다. 일반 사람들은 박금철을 김일성의 직계로 알고 있었으나(보천보 사건 관계로) 사실은 평양의 김일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며 박헌영의 덕을 입은 사람이다.
박갑동, 『박헌영(朴憲永) : 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 (서울, 인간사, 1983)은 위 중앙일보 연재물을 책으로 간행한 것이나, 박금철, 박달의 김일성 가짜 관련 부분은 수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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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갑동은 유사한 증언을 1974년에도 했다.

....박금철은 현재의 평양 김일성의 전대의 김일성의 지도하에서 갑산공작대를 조직하여 1937년 진짜 김일성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보천보를 습격할 때 지도를 그려 안내한자이며 ....


갑산공작위원회(甲山工作委員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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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중앙일보에 《진위 김일성 열전(眞僞 金日成 列傳) - 그 전설, 실존, 도명을 밝힌다》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 (38) 6사장 김일성의 죽음 중앙일보 1974.07.08 종합 3면
박갑동의 증언 + 박금철이 강계로 갔다 중앙으로 발탁되는 과정 소개.

진위 김일성 열전-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39) 6사장 김일성의 죽음(하) 중앙일보 1974.07.10 종합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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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50)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 중앙일보 1989.12.25 종합 5면
박달, 박금철에게 김일성 사진 보여주니 가짜라고 했다는 증언 나옴.

위 연재물은 아래 도서로 출판되었다.

박갑동,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 137~138쪽

박갑동, 북조선 악마의 조국 : 남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경악의 사실 (서울출판사, 1997)  : 227~236쪽

 

박갑동은 박헌영이 월북한 후 남로당 지하당 총책을 맡았다가 6.25 때 월북하여 북한 문화선전성 구라파 부장을 등을 지냈다. 박헌영 숙청시에 구금되었다 후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때 풀려나 북한을 탈출하여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

〈박금철(朴金喆)은 보천보 사건에 관계, 1946년 강계군 당조직부장,  1950 군사위원(軍事委員)으로 남침전쟁(南侵戰爭) 지휘함. 1953년 노동당조직부장(勞動黨組織部長), 1962년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부위원장(最高人民會議常任委員會副委員長), 1966년 노동당중앙위원회비서국비서(勞動黨中央委員會祕書局祕書), 1967년 3월경 중앙당회(中央黨會)에서 대남공작(對南工作)의 실패 책임과 소위 김일성(金日成) 빨치산을 혁명전통(革命傳統)으로 추진시키는데 반대의지(反對意志)가 있다하여 숙청당함.〉

위 박갑동의 저서에 의하면 박달(朴達, 1910~1960)과 박금철은 1937년 5월에 김일성을 만나 보천보 마을의 지도를 그려주었다고 하며, 보천보 습격은 6월 4일 밤에 이루어졌다. 이들은 보천보 사건 당사자인 김일성을 직접 아는 사람들로, 북한 김일성이 진짜인지에 대한 진실을 알았던 사람들이다.

이른바 혜산사건(惠山事件)은 1937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일본 관헌측이 김일성(金日成) 부대의 보천보(普天堡) 습격작전 후 국내 연계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조국광복회 회원 739명이 체포되고, 그 중 188명이 기소된 사건으로, 이때 박달과 박금철은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 해방후 석방되어 북한으로 갔다. 박달은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해방으로 집행은 면했지만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고, 박금철은 출옥할 때도 다리가 퉁퉁부어 있어 걷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마동희(馬東熙, 1912~1938)는 고문으로 옥사하고, 이효순(李孝淳, 1907~?)의 동생 이제순(李悌淳)은 1941년, 권영벽(權永壁, 1909∼1945)은 해방 직전 사형 당했다. 박록금(朴祿金, 朴录今, 1915.3-1940.10)은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을 진술한 공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아래는 박갑동의 박금철과 김일성 관련 증언 내용이다.

박갑동, 통곡의 언덕에서 (서당, 1991년) : 137~138쪽

우리는 서울의 각 신문사가 평양에 파견하는 기자들에게 각종 편의와 지원을 해주고 각 방향에서 소위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하는 김성주의 사진을 많이 찍어 오도록 부탁했다. 그들이 찍어 온 사진이 1백장을 넘었다.

이 사진을 박달(朴達)과 박금철(朴金喆)에게 보였다. 박달과 박금철은 1937년 6월 김일성이 보천보 시가지를 습격했을 때 갑산공작대를 조직하여 협조했으며 특히 보천보 시가지 지도를 그려 지형을 김일성에게 보고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8.15에 석방되어 공산당이 조직한 혁명가구원회(革命家救援會)에서 병 치료와 휴양을 하고 있었다. 특히 정태식은 그들과 서대문 형무소에서 같이 수감되어 있어 친했다. 10월 14일 평양운동장에 나타났던 자칭 '김일성 장군'이라는 자의 사진을 박달과 박금철에게 갖다 보이니 두 사람은 펄쩍 뛰며 전혀 다른 사람이며 나이도 전혀 틀린다고 했다.그들은 그때까지 서울의 공산당이 중앙이니 서울에서 일하려고 병치료를 하고 있었는데 곧 평양에 가서 사실을 알아봐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달은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있었고, 박금철은 전신이 퉁퉁부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화물자동차로 개성까지 태워 주었을 뿐 아니라 안내원을 시켜 박달을 등에 업혀 38선 입구까지 보내주었다.

두 사람은 평양에 도착하여 곧 김일성이라 자칭하는 자에게 면회를 신청했으나 분리당하여 각각 감금당하고 만다. 그들이 평양에 도착한 것이 11월인데 해가 바뀌고 다음 해 1월말에야 그들은 김일성이란 자에게 호출당했다.그들이 면회실에 들어가자마자 보천보를 습격한 김일성보다 열 살이나 젊어 보이며 키가 커 보이는 젊은 자가 "이 새끼! 전향하여 왜놈들한테 잘 얻어먹어 살이 쪘구나. 변절한 놈들은 보기도 싫어! 빨리 싹 없어져!"라고 호통을 치고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박금철은 앉은뱅이 박달을 평양에 남기고 혼자 강계로 떠나면서 서울의 박헌영에게 자칭 김일성에 대한 보고서를 보내왔다. 박헌영이 박금철의 보고를 권오직과 조두원에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나도 듣게 된 것이다.


[정태식은 당시 해방일보 편집국장인데 박금철과 6년간 같은 감방서 지내다 출소해 서로 친했으므로 해방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박갑동도 박금철과 자주 만나게 됨.]

해방일보 [解放日報]
정태식(鄭泰植, 1910 ~ ?)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주필
권오직(權五稷, 1906~?) 조선공산당 기관지『해방일보』의 주필 및 사장
조두원(趙斗元, 1903~1953 ?) = 조일명(趙一明)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편집장

박갑동, 북조선 악마의 조국 (서울출판사, 1997)  : 227~236쪽에도 위와 유사한 증언이 나오는데, 박금철은 1937년 5월 만주에서 김일성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보천보 습격 계획들 듣고 보천보의 지도를 그려 주었는데, 김일성은 1910년생인 박금철보다 10살 정도 연상이고, 키는 박금철보다 작았다고 한다.

그런데 해방후 출옥한 박금철이 평양에 가서 만난 김일성은 박금철 자신보다 2살 아래이고, 키도 더 컸기 때문에 보천보 김일성과 전혀 다른 인물이라고 하였다.

김일성이 키가 컸다는 것은 해방 직후 조만식 선생 비서관으로 일하며 조선생을 찾아오는 김일성을 자주 보았던 백선엽 장군도 증언한다.

    [백선엽의 6·25 징비록-39] 한강을 놓쳤던 김일성, 그는 전쟁을 잘 몰랐다. 2014.04.08
    내가 평양의 조만식 선생 사무실에서 김일성을 만났을 때 그는 별로 뚱뚱하지 않았다. 키가 훌쩍 컸고, 다소 말랐다는 인상을 줬다. 그러나 말수가 많았으며 아주 활달한 기운을 자랑했다. 조만식 선생 사무실을 들어설 때의 김일성은 일행 몇 명인가를 데리고 나타났는데, 행동거지나 말수라는 면에서 단연코 다른 이들을 압도했다. 아무래도 그가 당시 지녔던 정치적 위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소련을 등에 업은, 그래서 곧 북녘의 정치권력을 손에 쥘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또 박갑동은 같은 책(1997년)에서 경성일보 1937년 11월 18일의 김일성 전사 기사에 나오는 당시 36세(1901년 생)인 김일성이 진짜라고 하였다.

보천보 김일성의 전사 기사 (경성일보 / 동아일보 1937년 11월 18일)

또 북한 김일성이 맞는지 여부를 두고 계속 논란이 되는 사진의 안경끼고 마른 얼굴의 사람이 실제로는 북한 김일성 아닌 보천보 김일성이라고 했다.

논란의 사진 : 보천보 김일성?

이 사진의 주인공이 보천보 김일성이라는 주장은 새로운 것으로 보이는데, 박금철이 확인해 준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김씨 일가의 거짓과 진실] 가짜 김일성 2010-09-28 - 논란의 사진에 대한 구구한 설들.


박금철은 숙청될 무렵인 1967년 김일성과 권력 투쟁 당시 보천보 사건이 식량을 약탈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폭로하였다 한다.
    日本 東京에서 발행하는 <韓國時事> 1969年 7月號 書評欄을 보면 다음과 같은 句節이 있다. “재미나는 것은 1979年頃, 金日成 抗日鬪爭中에서 가장 힘주어 宣傳하고 있는 普天堡 戰鬪를 두러싸고 金日成과 朴金喆 사이에 論爭이 벌어진 事實이다. 전하는 바에 依하면 朴金喆(勞動黨最高幹部의 한 사람)은 金日成 一派로부터 政策問題, 特히 對南工作 戰略 戰術 問題에 對한 攻擊을 받고 窮地에 빠진 바 있으며 게다가 反日運動 當時 變節하여 日本警察과 內通했다고 까지 몰린 일이 있다고 한다. 이 때, 朴金喆은 ‘普天堡 戰鬪는 實은 抗日遊擊隊가 食糧을 掠奪하기 위해 우선 數名의 警官이 駐在하고 있는데 不過한 駐在所를 襲擊한 事件에 지나지 않는다’고 暴露하였다는 것이다.”
    [朴在侃, 金日成과 金成柱, 共産圈問題硏究所, 1970. p. 78]

박갑동의 위 증언은 사상휘보에 실린 혜산사건 수사기록을 근거로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당사자가 맞다고 한 이종석등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증거도 된다. 박금철이 바로 혜산사건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사상휘보(思想彙報, 1939년)의 혜산사건(惠山事件)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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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갑동(朴甲東, 1919~ )은 또 "1951년 평양에서 보천보를 김일성과 같이 습격한 군인과 친하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상관이던 김일성은 전사하고 없어 출세도 못하고 만년 소령으로 있다."고 했다는 증언을 하였다.

평양의 '金日成'이 '普天堡 습격'의 주인공일까 / 朴甲東 解放前後史의 爭点과 평가. 1, 獨立 建國運動의 主導勢力은 누구인가? (大邱 : 螢雪出版社, 1991)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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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갑동은 유사한 증언을 여러 곳에서 하고 있으므로, 거짓말을 계속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가 김일성에게 탄압받아 탈출한 사람이니 일부러 불리한 증언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므로, 이런 증언을 뒷받침하는 다른 사람의 증언을 하나 더 소개한다.

여운형(呂運亨)의 비서였던 이기건(李奇建, 1919~?)은 1945년 10월말 여운형의 밀서를 김일성에게 전달하러 평양으로 가는데, 역시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으로 가던 박금철과 동행하게 되었고, 박금철은 다리가 부어 걷는 것을 몹시 힘들어 했다고 하였다. 두 사람은 같이 김일성을 만났고, 이기건은 박금철과 김일성 사이에 오가는 말들을 현장에서 지켜 보았다.

이기건(李奇建, 1919년 ~ ?) 위키백과
이기건(李奇建, 1919년 ~ ?) 국사편찬위원회 인물 자료
이기건(李奇建, 1919년 ~ ?) 관련 자료


김일성이 박금철을 모른다고 했다는 이기건의 증언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한얼문고 1972, 고려원 1987)"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7> 괴뢰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6) 1972.01.27 동아일보 4면

... 해방되던 해 가을 呂運亨(여운형)이 金日成(김일성)에게 보내는 密書(밀서)를 가지고 평양으로 가 이를 金日成(김일성)에게 직접 전달했다는 李奇建(이기건)씨(五三 · 현재 内外問題研究所長(내외문제연구소장) 豫備役准將(예비역준장))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하루는 呂運亨(여운형) 선생이 金日成(김일성)에게 보내는 密書(밀서)를 전하고 오라는 부탁을 했읍니다. 아마 十(십)월 초순경이 아닐까요. 그때 三八(삼팔)선을 넘으면서 밤을 따먹고 감이 빨갛게 익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편지 내용은 모르지요. .... 부탁을 받고 서울驛(역)앞「세브란스」병원 앞길에 서있었더니 이미 귀띔을 받은대로 三(삼)명의 남자가 나타나길래 合流(합류)해서 서울驛(역)으로 갔지요. 開城行列車(개성행렬차)를 함께 타고 가면서도 서로 신분을 밝히지 않고 雜談(잡담)만 했읍니다.

그날 낮 開城(개성)서 내려 토성까지 걸어 가는데 그중 한 사람이 걸음을 잘 걷지 못하고 절룩거려요. 그러면서 자꾸 자동차가 없으니 달구지라도 얻어서 타고 가자고해요. 그러더니 그 남자는 바지를 걷어 통통 부은 다리를 내보이면서 그때 비로소"내가 朴達(박달)이하 같이 활동했던 朴金喆(박금철)이요. 해방이 될때까지 刑務所(형무소)에 오래 있어 이렇소"라고 자기 신분을 밝혀요. . 우리 일행 四(사)명은 그때 비로소 인사를 나누게 됐읍니다. 다른 두사람은 李克(이극)(후에 北韓(북한)괴뢰軍少將(군소장))과 沈雲(심운)이었읍니다.

李克(이극)은 延安派(연안파)로 清津(청진)서 잡혀 신의주에서 감옥에있다 三(삼)년만에 해방으로풀려나와 서울에왔다가 武亭(무정)이를 만나려 平壤(평양)으로 가는길이었고 沈雲(심운)은 南韓(남한)의 노동단체에 관계하던중 朴憲永(박헌영)의指令(지령)을 金日成(김일성)에게 전하러 역시 평양으로가는 길이었읍니다. . 朴金喆(박금철)은 金日成(김일성)을만나러가는 길이었는데 朴金喆(박금철)은 甲山派(갑산파)로서 그가 日警(일경)에 잡히기 전까지는 金日成(김일성)의 첩자로 甲山(갑산)에있었다 합디다.

그무렵 三八線越境(삼팔선월경)은 蘇聯軍(소련군)과 以北(이북)에서만 막았지 美軍(미군)측은 조금도 제한하지 아니했지요. 또 소련군도 물건만 좀주면 묵인했었고 三八線(삼팔선)부근의 주민들이 돈을 받고 길안내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넘어 다니기가 수월했읍니다.

우리 일행은 平壤(평양)에 도착해서 당시 共産黨平壤市黨委員長(공산당평양시당위원장)이던 玄七鍾(현칠종)을 만났더니 그는 金日成(김일성) 앞에서는 金丹冶(김단야)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읍니다. 金日成(김일성)이는 이 丹冶(단야) 얘기만 꺼내면 몹시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날 나와 朴金喆(박금철)은 玄(현)의 안내로 金日成(김일성)이가 묵고있던 제四(사)호 집인가로 찾아갔읍니다. 응접실에는 다갈색 양복을 입은 청년을 중심으로 四(사),五(오)명이 앉아있읍디다. 누가 덧니가 났나 우선 살폈지요. 가운데 있는 청년이 덧니가 나있어 그가 金日成(김일성)인가 보다고 생각했는데 소개를 하더군요.

그때 응접실에는 소련군 소좌 계급장을단 소련군복을 입은 崔庸健(최용건)과 소련 군복은 입고 있었으나 계급장을 달고 있지 않던 金策(김책)이 서 있었는데 金日成(김일성)이가 내가 준 편지를 뜯어 읽어보더니 곧장 金策(김책)에게로 넘겨주었읍니다.

金日成(김일성)은 나에게 시선을 돌려 "呂運亨(여운형)이가 組織(조직)이 얼마나 되오"라고 高壓的(고압적)인 어투로 물어요. 나는 불쾌해서 모른다고 대답했지요.

나와 金日成(김일성)이의 대면이 끝나자 朴金喆(박금철)이가 金日成(김일성)이 손목을 붙잡고 울면서 "동무! 나 모르겠읍니까"고 물으니까 金日成(김일성)이는 일언지하에 "모른다"고 비정하게 딱 잡아떼더군요. 그걸 보고 나는 누가 가짜일까 하는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읍니다.

사흘 후엔가 朴金喆(박금철)이와 같이 또다시 金日成(김일성)이를 만났는데 朴金喆(박금철)에게 "동무는 背反者(배반자)요. 그동안 동무에 대한 보천보 사건 재판 기록을 모두 뒤져보았소. 동무가 오늘까지 살아있는 것은 日本(일본) 놈과 협력했기 때문이요"라고 힐책하니까 흐느끼기만 합디다. 그때 共産黨(공산당)이 얼마나 냉철하고 무자비하다는 걸 피부로 느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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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증언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해방 직후 평양에 온 김일성(김성주)이 혜산사건의 수사 기록과 재판 기록을 이미 챙겨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수사기록(신문기록)에는 보천보 김일성의 신원이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르게 적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북한이 혜산사건 신문조서 자체를 공개 못하는 이유이다.


이명영, 김일성 열전 : 이기건과 박금철의 김일성 면담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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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야 [金丹冶, 1899 ~ 1938]

해방 직후 여운형이나 김일성은 김단야가 이미 죽고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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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금철이 김일성을 처음 만났을 때 있은 일은 박갑동과 이기건의 증언에서 약간 차이가 있으나, 김일성이 박금철을 일제에 협력한 배신자로 몰았다는 말은 일치하므로, 적어도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볼 수 있다. 김일성과 박금철이 처음 만나 오간 말들에 대해 박갑동은 박헌영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었으나, 이기건은 현장에서 직접 보았으므로 이기건의 증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기건은 김일성이나 박금철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고, 보천보 사건의 내막도 알지 못하니, 자신이 본 그대로 증언했을 것인데, 주요 내용이 박갑동의 증언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박갑동의 증언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오래 전 일의 디테일에 대한 박갑동의 기억은 다소 부정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박금철로서는 자기가 아는 보천보 김일성과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 그 김일성 행세를 하면서 사실상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어 있으니 난감했을 것이다. 사실대로 가짜라고 말할 수도 없고, 상대방이 보천보 당사자라 주장하는데, 그 사건에 참여하여 옥고까지 치르고 나온 것이 다 알려져 있는 박금철이 눈 앞의 김일성에 대해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박금철이 김일성에게 자신을 모르겠느냐고 물은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이 박금철을 모른다고 한 것은 실제로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다음에 만났을 때는 보천보 사건 재판 기록을 본 후 이므로, 자신이 보천보 김일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배신자라 욕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의 입장에서도 보천보 사건의 진실을 아는 박금철 같은 사람이 가장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당사자가 맞다면 자신을 도운 때문에 투옥되어 고생하다 풀려나 찾아온 박금철을 모른다고 하며 그렇게까지 박대할 수는 없다. 더구나 박달은 앉은뱅이가 되고, 박금철은 다리가 부어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는데도 김일성이 배신자라 욕한 것은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라 부담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기건은 김일성과 박금철 둘 중 누가 가짜일까 혼란스러웠다고 했는데, 박금철이 가짜일 수는 없으니, 김일성이 가짜인 것이 명확하다고 하겠다.

김일성이 나중에 다시 박금철을 등용할 때는 서로 비밀을 건드리지 않는 묵계가 있었을 것 같으나, 언젠가 진실이 폭로되는 두려움을 떨치기 힘들었을테니 끝내 박금철을 숙청하게 되었을 것이다.

박갑동은 김일성이 1967년에 박금철 등 갑산파를 모두 숙청한 것은 자신의 정체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김일성과 박금철 간에 서로 이를 문제삼지 않기로 묵계가 성립되어 박금철은 나중에 상당한 고위직까지 진출하게 되었지만, 김일성 우상화와 후계구도 확립에는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으므로 제거한 것으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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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갑동과 같이 박금철과 박달이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고 증언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또 있다. 남한에 남겨진 박헌영의 아들 승려 원경이다.

박헌영 아들 원경, 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북한 김일성 아닌 김창희

원경은 이현상도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이 아니라고 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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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朴達, 1910~1960)의 연락병 이선호씨 증언

[특종]『(북한의) 김일성(金日成)은 보천보(普天堡) 습격 당시 현장에 없었다』월간조선 2004년 12월호
普天堡 습격 현지 안내자(소년 연락병) 이선호(李善鎬)씨 생존·증언(證言)

[특종]『(북한의) 김일성(金日成)은 보천보(普天堡) 습격 당시 현장에 없었다』 전문 보기



1937년 10월 일본경찰에 체포된 박달(오른쪽), 박달은 1935년 박금철, 리효순, 허학성 등과 함께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직하면서 리제순의 소개로 동북항일연군 소속이던 김일성과 접촉하여 김일성(3번째 김일성)부대의 국내 거점 역할을 했다. [사진에 적힌 촬영일자 소화 13년 9월 22일은 1937년 아닌 1938년이다.]

1937년 10월 보천보 사건 국내 내응조직원으로 일경에 체포된 박금철(가운데 수갑찬 이)



사진 출처 : 보천보 길잡이 박금철, 박달 증언 “김일성은 가짜다” asiatoday 201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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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 갑산파는 빨치산들과 협력관계에 있었으나, 빨치산과는 구별된다.
박금철은 북한 김일성을 만났다 일제에 협력한 배신자라는 모욕을 당하고, 강계로 내려갔는데 월북한 박헌영이 다시 등용하여, 그 후 상당한 요직에까지 오르나 김일성 우상화와 후계구도 확립 과정에서 1967년 숙청당함.

中, 1967년 김일성 갑산파 숙청때 '불쾌' 아시아투데이 2013-12-17

中, 1967년 김일성 갑산파 숙청때 '불쾌' 연합뉴스 2013-12-17

[北 장성택 처형 이후] 張처형과 1967년 갑산파 사건 비교해보니 동아 2013-12-16

James Person, The 1967 Purge of the Gapsan Faction and Establishment of the Monolithic Ideological System Wilson Center


Modern Korean History Portal : Wilson Center

朴金喆(1912—1968) 百度百科
朴金喆(1912—1968) ja.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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