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 Gavril Korotkov 소련 자료 및 관계자 증언


가브릴 코로트코프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소련군 문서에는 북한 김일성의 이름은 1945년 10월 1일까지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으로 적혀 있고,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蘇(소),「6.25南侵(남침)」비밀文件(문건) 공개 1992.06.17 동아일보 2면
그는 이 과정에서 불법화된 공산당 중앙위원회소속 중앙문서보관소에 가장 가치있는 관련자료들이비장돼 있음을 알게 됐으며 여기서 金日成(김일성)의 개인신상과 한국전쟁에 관해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비밀내용들을 파악하게 됐다고 말했다. 金日成(김일성)의 이름과 관련,1945년 10월1일까지작성된 모든 문건에는「진지첸」이란 中國(중국) 이름으로표기됐으나 스탈린에 의해 북한지도자로 최종 선택된10월2일부터는 현재의 이름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그는 말했다.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18:15
러 국방부연구원, 金日成 관련 자료도
그는 이 과정에서 불법화된 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 중앙문서보관소에 가장 가치있는 관련자료들이 비장돼 있음을 알게 됐으며 여기서 金日成의 개인신상과 한국전쟁에 관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비밀내용들을 파악하게 됐다고 말했다.

金日成의 이름과 관련, 1945년 10월1일까지 작성된 모든 문건에는 '진 지첸'이란 중국 이름으로 표기됐으나 스탈린에 의해 북한지도자로 최종 선택된 10월2일 부터는 현재의 이름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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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특집]中共軍 한국전개입경위(上)(대체) 연합뉴스 1992-06-23 09:15
코로트코프著書`스탈린과 金日成'발췌 소개
<모자를 쓴 대위> 2차 대전의 탁월한 장군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던 말리노프스키는 유머도 풍부해서 아침마다 버릇처럼 "그래, '모자쓴 대위'가 또 무슨일을 저질렀는가 어디보자"라면서 전날의 전황보고서를 읽곤 했다....

[6.25특집]中共軍 한국전 개입 경위(中) 연합뉴스 1992-06-23 09:19

6.25특집]中共軍 한국전 개입 경위(下) 연합뉴스 1992-06-23 09:41
말리노프스키는 9월말 어느날(28일로 기억)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 중위, 조선에서 싸워보세. 우리의 '모자를 쓴 대위'가 똥을 쌌어(전쟁에 패배했다는 러시아 속어의 표현). 우리는 맥아더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6.25南侵(남침) 작전계획 蘇軍(소군)도 참여 1992.06.24 경향신문 4면
6.25南侵(남침) 작전계획 蘇軍(소군)도 참여 러 軍史硏(군사연) 코로트코프박사 주장 戰況(전황) 불리하자 金日成(김일성)교체 거론... 러시아 국방부산하 軍史(군사)연구소 책임연구원가브릴 코로트코프 ...
말리노프스키는 아침마다 버릇처럼"그래,「모자쓴대위」가 또 무슨일을 저질렀는가 어디 보자"라면서 전날의 전황보고서를 읽곤했다.「모자쓴 대위」는 金日成(김일성)의 별명이었다. 말리노프스키는 7월말한국전쟁의 전황을 종합분석키 위해 하바로프스크에서 관계전문가들을 소집,세미나를 개최한 일이 있었는데 회의 결과 북한군의 조기승리가...

부대단위 南侵(남침)진격로 명시 1992.08.30 경향신문 4면
... 승리"믿어 러시아국방부 산하 軍史(군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코로트코프박사는「조선인민군 선제타격계획」을 공개하면서이 계획을... 완전승리로 끝날것으로 믿어의심치 않았다고 전했다. 다음은 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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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訪韓(방한)한 러시아 軍史研(군사연) 코로트코프박사 1992.06.27 동아일보 5면
"「6.25」7개월前(전) 蘇(소)|中(중) 南侵(남침) 합의"
스탈린|毛澤東(모택동) 각본까지 검토

한국전쟁발발 7개월전인 1949년12월 스탈린과 毛澤東(모택동)은 모스크바에서극비회담을 갖고 한반도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한다는데 상호합의하고 이자리에서 상세한 전쟁시나리오까지 검토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또 中共軍(중공군)의 투입은 전황에 따라 급작스럽게 이뤄진것이 아니라 당시 두사람간의 회담에서 이미원칙적인 합의가 있었던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때 이들이 검토한 전쟁시나리오는 유엔군의 참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전쟁수행과정에서 蘇聯(소련)과 中國(중국)간의 지원방식에 큰 혼선을 빚었다는 것이다.
한국전 관련 세미나에참석차 訪韓(방한)중인 러시아역사아카데미회원이자 국방부軍史(군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인 가브릴 코로트코프박사(67·사진)는 26일 東亞日報(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은사실을 밝혔다. 코로트코프박사는 6.25당시....



「6.25眞相(진상)」베일벗다「스탈린극비電文(전문)」으로 드러난 南侵祕史(남침비사) 1992.07.28 동아일보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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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⑤김일성은 소련군의 심사를 받았다 동아닷컴 2004-09-12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가브릴 코로트코프 저 |어건주 역 |동아일보사 |1993

스탈린과 김일성. 2
가브릴 코로트코프 저 |어건주 역 |동아일보사 |1993
페이지 283 / ISBN 8970900608
Colonel Gavril Ivanovich Korotkov

[권1 p.175~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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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만한 한국인을 골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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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소련군들은 1945년 9월 동유럽과 극동의 넓은 지역을 실제로 관할했다. 진지첸이 자신의 생애 중 15년을 투자했던 ‘빨치산 전(戰)’은 지금 상태에서는 스탈린에게도 모택동에게도 필요치 않았다. 소련 극동전선으로 된 제88국제여단은 그 기본적 기능을 잃어버렸다. 막 군사적기 훈장을 받은 육군대위 앞에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붉은 군대의 집단 동원 해제가 시작되면서 매우 많은 장교들이 군사업무를 계속하느냐 ‘시민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육군대위 진치첸은 실망했다. 제88여단은 재편성돼야 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승진을 생각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채소밭에서 야채가꾸기를 계속하거나 보잘것없는 공무원이 되고싶지 않았다. 물론 당의 직원으로 출세할 수 있었으나 그는 이것이 ‘상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다시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9월 어느 날 “의논할 일이 있으니 하바로프스크로 곧 올 것”이라는 내용의 명령을 받았다. 진치첸은 그 곳으로 떠나서 며칠 수에 김일성이 되어 돌아왔다. 기적같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왜?’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대답을 얻지 못했다. 대답은 스탈린만이 할 수 있었다.

[권1 p.179~181]
미래의 ‘한국 국민의 지도자’에 대한 최초의 토의는 하바로프스크의 세르이쉐프 가(街)에 있는 제2극동군 사령부에서 이루어졌다. 군인들을 지휘하는 장군 푸르카예프와 극동군의 군사 소비에트의 일원인 육군 대장 슈킨의 토의에 참가했던 통역관은 토의의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젊고 근엄한 장교가 집무실로 들어와서 자기를 소개했다. ‘육군 대위 진치첸은 당신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장군 푸가예프는 그에게 앉으라고 권한 후 곧 질문을 시작했다. 그러나 육군 대위는 빨리 그리고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 당신은 한국인인가?
- 예.
- 당신은 평양 남쪽 지방에서 태어났나?
- 예.
- 당원인가?
- 예, 그렇습니다.
- 가족 사항은?
- 기혼이며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 당신은 붉은 군대에서 계속 근무하길 원하는가?
- 예, 그렇습니다.
- 만약 당신에게 북한에 일하러 가라고 제안한다면?
- 세계혁명과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면 항상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아주 훌륭한 대답이었소. ... 육군대장 슈킨이 답변했다.”

푸가예프 장군은 이력과 육군대위의 과거 활동에 대한 자료를 확인해보는 것과 관련된 몇 마디의 질문을 더 했다. 그 다음 진치첸에게 소베에트 정부의 결정에 따라 한민족의 여러 분야 전문가들을 일하기 위해 북한으로 보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거기에는 새로운 한국을 건설하는데 지휘할 능력을 자신 용사들이 필요하다. 그에게 특별임무가 부여될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빠른 시일에 내려질 것이다. 극동전선의 지도부가 모스크바에 제시한 자료에는 소비에트 군사령부가 생각했던 것처럼 모스크바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던 진치첸의 이력과 군경력에 대한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 들어 있다.

..김일성은 한국 평양 남쪽지방에서 4월 15일 태어났음.

출신 : 관리집안 출신. 아버지 김형직은 관동지방에서 교육계에 종사. 일본 당국에 의해 감시를 받음. 어머니는 가정주부.

친지들 : 형 김철주는 동만주로 도망갔음. 빨치산 운동에 참여했음. 1935년에 죽음. 숙부(아버지쪽) 김형원은 동만주로 도망가 일본군에게 잡혀 옥사. 외숙부 김진석 역시 동만주에서 살았음. 일본군의 감시를 받음. 사촌형제 김완주는 빨치산 운동의 참여자.

당에서의 일 : 김성주는 1935년 동만주에서 한국 공산당에 입당. ‘독립연맹’의 지도자 김두봉의 임무를 수행. 한국 빨치산 가운데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음.
전투경력 : 빨치산에서 명 년 있었음. 동만주의 빨치산 부대를 지휘함. 하바로프스크 군사보병 예비교육 과정을 받음. 여러 번 지도부의 표창을 받음. 1942년 소비에트 적기훈장을 받음.

정치.도덕적 성향 :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교육을 꾸준히 받고 있음. 자유분방한 성격. 사교성이 있음. 부하들 사이에 권위가 있음. 대중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영향력을 지님. 정신무장이 잘 되어 있음.


[p.185]
물론 후보자 김일성은 내무인민위원회쪽에서 ‘좋은 점수’를 얻어야만 했다. 모스크바에서는 모든 공산주의자들과 모든 가능한 자료들을 면밀히 분석하는 일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붉은 군대의 육군대위 진치첸에 대한 정치적 서류가 공산주의 한국의 미래 리더역에 후보자들 중의 하나로 그를 선택하게 한 기반이 되었다. 이를 훑어본 베리야는 ‘좋다’라고 했다.

육군대위 진치첸이 소비에트 군사.정치적 다수 요원들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는 그 사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45년 8~9월에 ‘지방 동료들’(즉 소연방에 살고 있었던 한인 공산주의자들) 가운데에서 ‘한국민의 지도자’역에 어울리는 후보자를 찾을 때 장군들의 한 마디는 커다란 힘을 발휘했다. 육군대위 김일성의 운명에 육군대장 슈트이코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김일성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으며 이 한국인을 평양으로 보낼 수 있도록 스탈린에게 청원하라고 원수인 메레츠코프를 설득했다. 스탈린에게 있어서 군활동가들의 의견은 다소 의미를 지녔으며 하바로프스크에서 있었던 진치첸에 대한 평가 중에서
“..의지가 있으며 명예를 존중하고 군사업무를 알고 좋아하며 부하를 통솔할 능력을 갖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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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관련 미공개 舊蘇비밀문건 공개 연합뉴스 | 입력 1992-06-16 17:33

러 국방부연구원, 金日成 관련 자료도

(모스크바=聯合)金興植특파원= 北韓주석 金日成이 자신의 위업으로 내세우고 있는 항일 빨치산투쟁의 진상과 스탈린에 의해 지도자로 선택된 과정, 그리고 한국전쟁 기원 등에 관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진상들이 담긴 舊소련의 비밀문건들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러시아 국방부직속 軍史연구소 책임연구원 가브릴 코로트코프 박사(역사학.아카데미준회원)는 16일 연합통신과 가진 단독회견에서 金日成의 항일 빨치산투쟁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소련군의 명령에 의해 수행된 것이며 한국전쟁이 북한에 의한 남침임을 여실히 증명하는 비밀문건들을 제시했다.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 당시 平壤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가 개전 첫날인 6월25일 스탈린에게 긴급히 보낸 암호전문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이 강을 습격, 서울을 향해 매우 빠른 속도로 진격하고 있다. 平壤은 평온한 분위기이며 시민들은 전쟁이 일어난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돼있어 어느 쪽이 전쟁을 일으켰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코로트코프박사는 소련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후인 지난해 10월 당시 국방장관 샤포슈니코프 원수(현재 독립국가연합 통합군 총사령관)로 부터 "한국정쟁에 관한 진실을 규명, 공식적인 입장을 정립하라"는 특별지시를 받고 93년7월까지 작업완료를 목표로 자신을 팀장으로 한 5명의 연구원이 현재 비밀문건들을 중심으로 연구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 과정에서 불법화된 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 중앙문서보관소에 가장 가치있는 관련자료들이 비장돼 있음을 알게 됐으며 여기서 金日成의 개인신상과 한국전쟁에 관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비밀내용들을 파악하게 됐다고 말했다.

金日成의 이름과 관련, 1945년 10월1일까지 작성된 모든 문건에는 '진 지첸'이란 중국 이름으로 표기됐으나 스탈린에 의해 북한지도자로 최종 선택된 10월2일 부터는 현재의 이름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전쟁 개시와 함께 당시 소련 극동군총사령관 말리노프스키원수 휘하에서 특별정보팀의 일원으로 한국전에 관여한 이래(대좌로 예편) 줄곧 金日成-스탈린관계 및 한국전쟁만을 연구하고 있는 코로트코프박사는 러시아에서 이 전쟁에 관한 최고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는데 현재 이에 관한 3권의 책 가운데 1,2권은 집필을 완료하고 나머지는 연말까지 끝내 내년초 출판할 예정으로 있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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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 입력 1992.06.16 18:15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 입력 1992-06-16 18:15


(모스크바=연합(聯合)) 金興植특파원= 다음은 코로트코프 박사가 비밀문건을 중심으로 金日成의 항일빨치산투쟁, 집권과정 및 한국전쟁에 관해 밝힌 내용의 요약이다.

◇항일빨치산투쟁: 金日成이 붉은 군대에 정식 입대한 것은 1942년 7월17일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45년 8월30일 그가 적기훈장을 수여받은 훈장증서에서 명백히 나타나 있다. 金이 훈장을 받게 된 공적사항으로는 항일빨치산투쟁을 훌륭히 수행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이에 앞서 金이 소련군 대위로 진급시 승진상신서에는 "진지첸을 만주에서 빨치산대장으로 활동하도록 파견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는 金日成이 북한당국의 공식 선전에서 처럼 스스로 빨치산부대를 편성, 지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소련극동군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金日成은 이보다 훨씬 앞서 32년에 동만주에서 중국인 양정우가 지휘하는 빨치산부대에 참가, 사병으로 출발해서 소대장까지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은 어디까지나 소련군의 지휘하에서 수행됐다.

특히 金日成이 45년 9월 중순 북한지도자로 선발되기 위한 면접을 하기 직전 심사위원격인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 상급대장과 동 군사위원 슈킨 대장 앞으로 제출된 金의 인물평가서에는 ▲동만주에서 빨치산활동 참가 ▲하바로프스크 군사학교에서 특수과정 수료 ▲수차 걸쳐 사령부로 부터 표창 ▲42년 입대, 현재 대대장 등 연대순으로 기록돼 있는데 입대 전에 이미 소련군 당국으로 부터 표창을 수차 받은 사실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도자로 선택된 과정: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따라 金日成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특수저격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金은 "특별인터뷰를 위해 즉각 하바로프스크로 돌아가라"는 돌연한 명령을 받았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당시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와 군사위원 슈킨을 면접했는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소련군 통역관은 후일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고 나에게 말했다. 金에게는 질문에 답변만 하도록 허락되었는데 간단하고 명료하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金-"진지첸은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로 시작됐다.)

--귀관은 한국인인가?

▲ 그렇다.

--남평양에서 태어났는가?

▲그렇다.

--공산당원인가?

▲그렇다.

--가족은?

▲결혼했고 아들이 하나 있다.

--붉은 군대에서 계속 근무하고 싶은가?

▲그렇다.

--그렇다면 북한에 가서 일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세계혁명에 도움이 된다면 어디든 가겠다.

(여기서 소련장군들은 "좋아. 대답 잘했어"라고 칭찬)

두 장군은 이어 몇가지 경력을 물은 후 金에게 "소련정부의 결정에 따라 한국국적을 가진 전문가들이 북한에 보내지고 있다. 현재 북한은 새 조국을 건설할 전사들이 필요하다. 귀관은 가장 빠른 시일내에 특별임무를 받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들의 이같은 발언은 金日成이 이미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앞서 모스크바에서는 북한의 새 지도자감으로 많은 후보들이 심도있게 분석,평가되었다. 주로 張時雨, 박동홍 등 코민테른그룹과 박헌영, 김두봉 등 자생적 공산주의자, 金日成 등 만주그룹, 그리고 조만식 선생 등 非공산 민족주의자들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한국의 공산활동가들은 어미없는 새끼고양이에 불과해 적이 처들어오면 흩어질 수 밖에 없다. 한반도 해방은 이를테면 아버지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들에게 아버지(지도자)가 절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위의 인물들이 군대지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거부했다.

스탈린은 특히 "현재 그들에게 군사업무를 가르치기에는 시간이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충실하고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실질적인 경험을 가진 사람을 지도자로 선택해야 한다"고 소련 극동군사령부에 지시, 결국 그의 구미에 딱맞는 인물을 물색한 결과 金日成이 돌연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하여 지도자로 선택을 받은 金은 45년 10월2일 부터 진지첸이란 이름을 버렸으며 8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소련함정 푸가초프號를 타고 원산에 도착했다.

당시 원산시 소련 군정책임자인 크루지코프 대좌가 영접했는데 그는 후일 본인과의 면담에서 金日成 영접은 평양의 스티코프 대장의 긴급명령으로 행해졌다고 말했다. 스티코프는 크루지코프에게 "내일은 아주 고귀한 한국인이 도착할 것이다. 그의 신변안전과 숙박은 물론 평양까지 호위하는데 만전을 기하라"고 명령했다. 크루지코프가 맞은 사람은(군복이 아니라) 쥐색양복을 똑같이 입은 일단의 한국인들이었는데 맨 먼저 나온 사람이 "내가 김일성이오"라고 인사했다. 크루지코프는 10월14일 열린 평양군중대회에서 金日成이 연설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자신이 조선의 최고지도자를 만난 것을 알게 됐다고 회상했다.

◇한국전쟁 관련: 한국전쟁이 어느 편에 의해 발발됐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모스크바와 평양은 <해방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정을 내렸으며 다만 시기에 관해서는 金日成이 6월25일 단추를 눌렀을 뿐이다. 이번에 확인된 비밀문건 가운데는 당시 평양주재 대사 스티코프가 개전 당일 스탈린에게 보낸 긴급전문이 있다. 이 전문에는 "조선인민군이 강을 습격하고 아주 빠른 속도로 서울로 진격하고 있다. 평양은 아주 조용한 분위기이며 사람들은 누구도 전쟁개시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씌여 있다. 또 국방부 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문건에는 <작전계획 초안>도 있는데 이에 따르면 "6월25일, 00탱크연대는 00도시로 향한다. 00보병사단은 00방향으로 진출한다"는 식으로 연대급 이상 부대의 목표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으며 이밖에 <서울점령초안>도 포함돼 있다.

전쟁이 초기 승리에서 미군(美軍)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金日成은 크게 당황했다. 당시 스티코프가 스탈린에 보낸 전문에는 "金日成이 쇼크를 받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의 군대지휘와 국가지도는 엉망이 되고 있다. 金은 지하사령부에서 본인에게 '나는 실패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또다시 빨치산투쟁을 하는 것 외는 다른 길이 없을것 같다. (미군(美軍)의 진격이 너무 빨라서) 상황이 긴박하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부탁해 나의 생명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돼 있다. 당시 스티코프는 스탈린으로 부터 거의 참모부 보다 더 신뢰를 받는 인물로 그의 전문은 항상 스탈린에게 직접 전달되었기 때문에 전쟁상황과 金에 대한 평가는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이 대부분이었다.

스탈린은 10월 전쟁이 실패했음을 느끼자 수습책임을 중국에 떠넘기기 시작함과 동시에 초기에는 매우 빈번히 金과 전문을 주고 받았으나 이때 부터는 金에게 아무런 답신도 보내주지 않음으로써 실망감을 표시했다.

당시 스탈린 측근으로 총참모부 작전부장이었던 스테멘코 장군은 후일 본인과의 인터뷰에서 스탈린이 "金은 아주 무능한 장군이다. 그가 어려운 시기에 처해 의지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인물이 없으니 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본인이 말리노프스키 원수(극동군총사령관) 휘하에서 한국전 정보담당 장교로 재직시 그는 金日成을 한번도 이름으로 호칭하는 법이 없이 오직 <모자를 쓴 대위>라는 별칭으로 부르면서 "그는 진짜 군인이 아니다. 군대지식도 적고 전쟁도 제대로 지도하지 못한다"고 불평했다. 이같은 평가들을 놓고 볼 때 金은 전쟁에서 그다지 훌륭한 지휘를 한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한국과 관련된 소련군: 45년 8월 소련군의 북한진주 부터 53년 종전까지 한반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은 군인은 모두 약 1백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 훈장을 받았거나 전사자, 부상자 및 유가족들은 2차대전 심지어는 최근의 아프간전쟁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아무런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소련당국(지금은 러시아정부)이 한국전 개입사실을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본인 역시 한국전쟁과 관련해 적성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훈장증서에는 이상하게도 "조선전쟁에서 주어진 과업을 수행했으므로 이 훈장을 수여함"으로만 돼 있고 구체적인 공적사항은 전혀 없다. 이는 극히 이례적인 것이다. 더구나 어느 전쟁의 경우에나 받는 전쟁참가 증명서도 발급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훈장수여자들이 당연히 받게 돼 있는 면세, 보다 많은 연금, 무료여행, 특별상점이용 등 특전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다. 최근 소련의 한국전 참전내용이 점차 공개되면서 국방부와 군사(軍史)연구소로 왜 아직도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는가 하는 문의전화가 늘어나고 있다.(끝)

Shikin, Iosif Vasil’evich (1906 – 1973)
was made a member of the Military Council of the High Command of the Soviet Forces in the Far East in August 1945.

Iosif Vasilevich Shikin (1906 – 1973)
Maksim Alexeyevich Purkayev (1894 -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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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144621
스탈린과 김일성. 2
가브릴 코로트코프 저 |어건주 역 |동아일보사 |1993
페이지 283 / ISBN 8970900608

http://books.google.co.kr/books/about/%EC%8A%A4%ED%83%88%EB%A6%B0_%EA%B3%BC_%EA%B9%80%EC%9D%BC%EC%84%B1.html?id=PfGYXwAACAAJ&redir_es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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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ationalalliance.org/korea/korea04.htm

Colonel Gavril Ivanovich Korotkov

AII POW-MIA Transfer or '77' Page Report
www.aiipowmia.com, 26 Aug 1993 [cached]
Colonel Gavril I. Korotkov . . . . . . . . . . . . . . . . . . . .27
...
Colonel Gavril I. Korotkov.Another Soviet source is retired Soviet Army Colonel Gavril Ivanovich Korotkov, who served from July 1950 to mid-1954 as part of a general staff-based analytical group reporting to Marshal Rodion Malinovskiy, then commander-in-chief, Far East Military District, on developments in intelligence (tactical and technical) gained from the ongoing war in Korea.
...
Specifically, Korotkov's political section was responsible for reporting on political information, the morale and psychological well-being of U.S. units engaged in Korea.
...
Korotkov was not aware of exactly who selected which American POWs for transfer to the Soviet Union for further interrogation, or which criteria were used in the selection process, but the most likely characteristics were experience, i.e., seniority - field grade officers and above.Two separate groups handled these military interrogations, the GRU-subordinated intelligence group which was interested in detailed tactical and technical intelligence, and the main political directorate-subordinated group, which was interested in political intelligence.
Korotkov had only limited knowledge of the procedures for the movement of Americans to and through the USSR.He did not know where the processing facilities or camps were located in North Korea.On several occasions he had visited the Soviet naval base at Pos'yet which served as a transit point for the movement of American POWs north to Khabarovsk.Although there was an airfield nearby, he believed that the bulk of the Americans were transported from Pos'yet to Khabarovsk by rail, but most likely at least some of the POWs were moved from North Korea or China by air.
Korotkov stated that the American POWs were kept under the control of the MGB.Generally, military interrogations had only a few hours with the Americans, although they sometimes had up to a few days, depending on the nature and perceived value of the information or source.While the POWs were at Khabarovsk, the MGB controlled them when they were not being interrogated.Once the process was completed, the POWs were returned to the control of the MGB.Therefore, Korotkov stated, he had no direct knowledge of the fate of these personnel.Although Korotkov did not know the exact number, he felt that the number of Americans processed through Khabarovsk was in the hundreds.Despite the fact that his political group had access to only a portion of the total number of POWs interrogated by the analytical group, he felt confident in this high estimate.Following the rout of the 24th Infantry Division in July and August 1950, there were "tens of American POWs" as Colonel Korotkov put it, but the number climbed quickly through the first months of the war.Furthermore, he indicated that operational directives said that Americans caught behind North Korean lines should be taken alive.Moreover, Korotkov indicated that the Koreans were quite willing to allow the Soviets direct access and eventual control over U.S. POWs.By contrast, the Chinese, according to Colonel Korotkov, were very reluctant to release control over Americans who came into their hands.
Colonel Korotkov (above name hand written note: NOT TRUE-was ORLOV) further stated that he had personally interrogated two American POWs, one of whom was a LTC Black.He could not remember the names of any other of the American POWs who had been processed through Khabarovsk.All reports on U.S. POW interrogatins from Colonel Korotkov's analytical group were forwarded to the Headquarters, Far East Military District.
...
Korotkov is a respected military officer with prestigious academic credentials.(58)
Soviets Used Our POWs for Nazi-Like Experiments
www.freerepublic.com [cached]
Colonel Gavril I. Korotkov.Another Soviet source is retired Soviet Army Colonel Gavril Ivanovich Korotkov, who served from July 1950 to mid-1954 as part of a general staff-based analytical group reporting to Marshal Rodion Malinovskiy, then commander-in- chief, Far East Military District, on developments in intelligence (tactical and technical) gained from the ongoing war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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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fically, Korotkov's political section was responsible for reporting on political information, the morale and psychological well-being of U.S. units engaged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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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otkov was not aware of exactly who selected which American POWs for transfer to the Soviet Union for further interrogation, or which criteria were used in the selection process, but the most likely characteristics were experience, i.e., seniority - field grade officers and above.Two separate groups handled these military interrogations, the GRU-subordinated intelligence group which was interested in detailed tactical and technical intelligence, and the main political directorate-subordinated group, which was interested in political intelligence.
Korotkov had only limited knowledge of the procedures for the movement of Americans to and through the USSR. he did not know where the processing facilities or camps were located in North Korea.On several occasions he had visited the Soviet naval base at Pos'yet which served as a transit point for the movement of American POWs north to Khabarovsk.Although there was an airfield nearby, he believed that the bulk of the Americans were transported from Pos'yet to Khabarovsk by rail.But most likely at least some of the POWs were moved from North Korea or China by air.
In 1992 a retired Soviet colonel ...
www.nationalalliance.org, 21 April 2001 [cached]
In 1992 a retired Soviet colonel - Gavril Korotkov claimed that American POWs were taken to the Soviet Union for interrogation. Colonel Korotkov recalled that while on the territory of the Soviet Union the NKVD maintained control over the Americans. Soviet military interrogators were given only a few hours with the Americans and then they were returned to NKVD control.
pp 26-33 Transfer of U.S. Korean War POWs To the Soviet Union
www.nationalalliance.org, 10 Nov 1992 [cached]
Colonel Gavril I. Korotkov. Another Soviet source is retired Soviet Army Colonel Gavril Ivanovich Korotkov, who served from July 1950 to mid-1954 as part of a general staff-based analytical group reporting to Marshal Rodion Malinovskiy, then commander-in- chief, Far East Military District, on developments in intelligence (tactical and technical) gained from the ongoing war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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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fically, Korotkov's political section was responsible for reporting on political information, the morale and psychological well-being of U.S. units engaged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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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otkov was not aware of exactly who selected which American POWs for transfer to the Soviet Union for further interrogation, or which criteria were used in the selection process, but the most likely characteristics were experience, i.e., seniority - field grade officers and above. Two separate groups handled these military interrogations, the GRU-subordinated intelligence group which was interested in detailed tactical and technical intelligence, and the main political directorate-subordinated group, which was interested in political intelligence.
Korotkov had only limited knowledge of the procedures for the movement of Americans to and through the USSR. he did not know where the processing facilities or camps were located in North Korea. On several occasions he had visited the Soviet naval base at Pos'yet which served as a transit point for the movement of American POWs north to Khabarovsk. Although there was an airfield nearby, he believed that the bulk of the Americans were transported from Pos'yet to Khabarovsk by rail. But most likely at least some of the POWs were moved from North Korea or China by air.
Korotkov stated that the American POWs were kept under the control of the MGB. Generally, military interrogators had only a few hours with the Americans, although they sometimes had up to a few days, depending on the nature and perceived value of the information or source. While the POWs were at Khabarovsk, the MGB controlled them when they were not being interrogated. Once the process was completed, the POWs were returned to the control of the MGB. Therefore, Korotkov stated, he had no direct knowledge of the fate of these personnel. Although Korotkov did not know the exact number, he felt that the number of Americans processed through Khabarovsk was in the hundreds. Despite the fact that his political group had access to only a portion of the total number of POWs interrogated by the analytical group, he felt confident in this high estimate. Following the rout of the 24th Infantry Division in July and August 1950, there were "tens of American POWs" as Colonel Korotkov put it, but the number climbed quickly through the first months of the war. Furthermore, he indicated that operational directives said that Americans caught behind North Korean lines should be taken alive, not killed. A number of American pilots were taken alive. Moreover, Korotkov indicated that the Koreans were quite willing to allow the Soviets direct access and eventual control over U.S. P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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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otkov is a respected military
57 Amembassy Moscow Message, 261132Z Oct 92, Subject: POW/MIA: Follow-Up Interview with Colonel Gavril Korotk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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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Amembassy Moscow Message, 261132Z Oct 92, Subject: POW/MIA: Follow-Up Interview with Colonel Gavril Korotkov.
Russian Help Needed in Finding Servicemen • U.S. citizens may have died in Soviet gulags
www.freerepublic.com, 10 Nov 1992 [cached]
Colonel Gavril I. Korotkov.Another Soviet source is retired Soviet Army Colonel Gavril Ivanovich Korotkov, who served from July 1950 to mid-1954 as part of a general staff-based analytical group reporting to Marshal Rodion Malinovskiy, then commander-in- chief, Far East Military District, on developments in intelligence (tactical and technical) gained from the ongoing war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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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fically, Korotkov's political section was responsible for reporting on political information, the morale and psychological well-being of U.S. units engaged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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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otkov was not aware of exactly who selected which American POWs for transfer to the Soviet Union for further interrogation, or which criteria were used in the selection process, but the most likely characteristics were experience, i.e., seniority - field grade officers and above.Two separate groups handled these military interrogations, the GRU-subordinated intelligence group which was interested in detailed tactical and technical intelligence, and the main political directorate-subordinated group, which was interested in political intelligence.
Korotkov had only limited knowledge of the procedures for the movement of Americans to and through the USSR. he did not know where the processing facilities or camps were located in North Korea.On several occasions he had visited the Soviet naval base at Pos'yet which served as a transit point for the movement of American POWs north to Khabarovsk.Although there was an airfield nearby, he believed that the bulk of the Americans were transported from Pos'yet to Khabarovsk by rail.But most likely at least some of the POWs were moved from North Korea or China by air.
Korotkov stated that the American POWs were kept under the control of the MGB.Generally, military interrogators had only a few hours with the Americans, although they sometimes had up to a few days, depending on the nature and perceived value of the information or source.While the POWs were at Khabarovsk, the MGB controlled them when they were not being interrogated.Once the process was completed, the POWs were returned to the control of the MGB.Therefore, Korotkov stated, he had no direct knowledge of the fate of these personnel.Although Korotkov did not know the exact number, he felt that the number of Americans processed through Khabarovsk was in the hundreds.Despite the fact that his political group had access to only a portion of the total number of POWs interrogated by the analytical group, he felt confident in this high estimate.Following the rout of the 24th Infantry Division in July and August 1950, there were "tens of American POWs" as Colonel Korotkov put it, but the number climbed quickly through the first months of the war.Furthermore, he indicated that operational directives said that Americans caught behind North Korean lines should be taken alive, not killed.A number of American pilots were taken alive.Moreover, Korotkov indicated that the Koreans were quite willing to allow the Soviets direct access and eventual control over U.S. P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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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otkov is a respected military
57 Amembassy Moscow Message, 261132Z Oct 92, Subject: POW/MIA: Follow-Up Interview with Colonel Gavril Korotk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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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Amembassy Moscow Message, 261132Z Oct 92, Subject: POW/MIA: Follow-Up Interview with Colonel Gavril Korotk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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