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데프 비망록』 소련 자료 및 관계자 증언

레베데프(Nikolai Lebedev, 1901 – 1992) 소장 부음 기사 / 사진
김일성 수령 만들기 공작을 주도한 소련군정 인사들의 증언


송광호 칼럼 <47> 모스크바 특파원(초대-2대)시절 회고 레베데프 비망록 입수과정

김구는 왜 건국을 반대했나? [정밀복기] 김구와 건국 반대 운동 내막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l승인2015.08.10
남시욱, 청소년을 위한 현대사 강좌 (5) 金九·金奎植의 南北연석회의 참석 월간조선 2006년 4월호
蘇 공산당, 평양 정치협상 개최 결정
남북협상 中 북한 헌법 草案 심의
金九·金奎植의 南北연석회의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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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중, "레베데프 비망록"(2016.12.30) 간행 출판사
제주시 해동인쇄사
전화 064-751-0340 / 제주 제주시 삼도일동 545-22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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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권 수립 내막 / 스티코프 비망록 / 레베데프 비망록

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蘇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1면
민족분단을 막기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1948년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南北)지도자연석회의와 김구(金九).김일성(金日成).
김규식(金奎植).김두봉(金枓奉)등 남북정치지도자들의 회담이 소련측의 주도면밀한 각본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관계기사 8面〉 이같은 사실들은 中央日報가 창간 30주년사업으로 추진중인 현대사 자료발굴과정에서 단독 입수한 소군정(蘇軍政)정치사령관과 민정사령관을 겸임했던 니콜라이 게오르기예비치레베데프 소장(少將.92년5월 모스크바에서 90세로 사망)의 일기 형식 비망록(대학노트 크기 1백97쪽)에서 밝혀진 것이다. 지금까지 남북지도자 연석회의에 대한 소련측의 의도와 역할,蘇군정의 북한정권 수립과정 등이 문건으로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비망록에는 북조선 인민위원장 김일성과 북조선 노동당 위원장 김두봉이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와 민족자주연맹 대표 김규식등 이른바「4金회담」에서 김구와 김규식에게『헌법은 채택하지만당분간 내각은 구성하지 않고 김구.김규식 두 선생에게 직위를 부여하고 헌법을 통과한 후 통일정부를 세울 계획』이라고 제의,두 정치지도자를 회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와 함게 蘇군정은 김구와 김규식 일행이 남북(南北)지도자 연석회의를 결렬시키거나 회의에서 퇴장하면 이들을「미제(美帝)간첩」으로 폭로하는 대책을 수립해 놓았다.
특히 비망록에는 남한(南韓)으로부터 받은 정세보고에서 김구가기자들에게『나를 5월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기록,김구는 평양으로 출발하기전 자신의 암살을 예견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후 평양에 간 김구는 48년5월3일 1시간30분동안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만일 미군정(美軍政)이 나를 강하게 압박하면북한에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은가』라고 묻자『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김두봉은 4월25일 밤 레베데프 소장에게『김규식을 5월10일까지 평양에 체류하도록 하자』고 건의,김규식이 미군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있음을 감안,그를 북한에 묶어 두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비망록에는 소군정이 소련군 극동(極東)사령부 정치위원이자 스탈린의 북한문제 전권대사격인 스티코프 대장(大將)의 재가를 받아 남한의 김구와 김규식이 제의한 남북 대표자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열겠다고 발표하고 연석회의에 김구와 김규식을 평양으로 불러 들여▲남한의 총선 반대와 분쇄▲유엔 한국(韓國)임시위원회 조선(朝鮮)에서 추방▲소.미군 철수▲임시정부수립을 위한 남북총선거는 외국군 철수후 실시 등 한반도의 소비에트화를 위한 4가지 지침을 관철토록 김일성에게 지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를 위해 소군정은「혁명논리와 투쟁전략」을 주 내용으로 연석회의 참석자들의 결의문에 해당하는「조선인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사전에 작성해 남한대표들에게도 이같은 지침을 미리 시달하여지침 내용대로 연설을 준비토록 지도하라고 했다.
소군정은 또 북한 정부 수립 두달전 김일성이 수상과 민족보위상(국방부장관)을 겸임하고 박헌영(朴憲永)은 외무상만 맡도록 하는등 초대 수상과 내각,최고 인민회의 상임의장단 등에 대한 후보명단을 작성해 모스크바「중앙」(소련공산당 중앙 위원회 또는스탈린을 지칭)에 상신했으나「중앙」이 남한인사들이 소외됐다고 지적,김일성은 수상만 맡고 박헌영은 제1부수상겸 외무상,남로당(南勞黨)의 이승엽(李承燁)을 사법상,조선인민공화당 당수 김원봉(金元鳳)을 검열상으로 각각 추가 시키라고 지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소군정은 이밖에 남북 정치협상의 와중에서도 인공기와 인민군기를 속히 제작하도록 김일성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이같은 사실들은 지금까지 남북연석회의와 북한정부 수립등을 소군정이 주도했을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을 해왔을 뿐 이를 증명할만한 소련측의 사료가 없었으며 특히 이들 과정 모두를 김일성이주도했었다는 북한 당국과 한국의 일부 주장을 정면으로 뒤엎게 된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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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4김회담>1.레베데프 비망록-자료적 가치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8면

『레베데프 비망록』은 자료의 희귀성과 가치성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다.
비망록의 작성자인 레베데프는 1945년 8월말부터 소련점령군사령부의 정치사령관을 역임했고,47년 중반부터는 민정사령관을 겸임하면서 북한정권 탄생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이 비망록은 48년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가 소련측의 각본에 따라 개최된 것임을 극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남북연석회의의 주도자와 조정자가 소련측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것으로 후기 해방정국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된 남북협상의 성격과 그 역사적진실을 밝혀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비망록은 일기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어 남북연석회의의 전모를 진행과정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비망록에 의하면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명령계통은 당시 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치위원이었던 스티코프-레베데프-김일성으로 이어지고,주요 결정은 스티코프와 레베데프간의 협의를 거쳐 김일성에게 지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 극동사령관 비르소프와 스티코프 사이에 북한에 대한 정책결정의 주도권을 놓고 미묘한 갈등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소련측과 김일성등은 일련의 소비예트화과정을 통해 북한정권 수립을 위한 제반 준비를 끝낸 후 자신들이 수립할 정권에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김구와 김규식을 회유하려고 했음이 밝혀졌다. 이를테면 그들에게 일정한 직위를 부여하는 대가로 그들의참여하에 헌법을 통과시킨 후 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운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비망록에서 드러난 한가지 충격적인 사실은 김구가『(남한에서)나를 5월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언급한 대목이다.김구의 암살배후자가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김구가 이 무렵에 벌써 자신에 대한 암살을 예견했다는 점은 폭력과테러로 얼룩진 당시의 격동의 정치상황을 실감케 한다.
또한가지 주목을 끄는 대목은 북한 조선노동당의 초대위원장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의장및 김일성대학교의 총장등을 역임하다가 58년 연안파에 대한 숙청때 실각된 김두봉을 소련측이 48년4월부터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이유로 특 별감시를 지시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레베데프 비망록』을 통해 모두 처음 공개된 것들로 이 비망록의 자료적 가치를 단적으로 입증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해방정국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이 시기의 실질적인 주도세력인미국과 소련의 자료를 함께 분석할 때만이 가능하다.
미국측 자료는『25년이 경과한 자료는 미국의 국가이익을 해치지 않는한 모두 공개한다』는「자료공개법」에 따라 대부분 입수가가능하다.
그러나 소련측 자료는 극히 일부 자료를 제외하고는 거의 공개되지 않았으므로 이용 자체가 불가능한 실정이다.
이렇게 볼 때『레베데프 비망록』은 한국현대사의 새로운 역사적진실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현대사 자료의 커다란 공백의 한 부분을 메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기고자 : 이동현


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蘇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1면
<평양의4김회담>1.레베데프 비망록-자료적 가치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1.46년만에 밝혀진 南北정치협상 진상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2.金九 올때까지 대표자회의 연기 [중앙일보] 1994.11.16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2.<해설>蘇군정 남한정세 손금보듯 [중앙일보] 1994. 11.16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3.蘇,김일성에 신문보도 일일이 지시 [중앙일보] 1994.11.17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4.白凡 "나는 김일성 만나러 왔을뿐" [중앙일보] 1994.11.21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5.蘇 朴憲永도 빠뜨려선 안된다 [중앙일보] 1994.11.22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6.蘇 南대표에 총선후 정부수립약속받아라 [중앙일보] 1994.11.23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7.끝 조만식 南行 白凡요구에 金日成침묵 [중앙일보] 1994.11.24 종합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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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데프 비망록]22, 매일신문 1995년 2월 23일자

사고-소군정치하 북한베일 벗긴다 매일신문 1994-11-15
"김일성 핵 야욕이 {6.25} 불렀다" 매일신문 1994-12-28

레베데프 비망록 해설 매일신문 1995.01.04

북정권 수립 비사 레베데프 비망록 매일신문 1995.01.04

북정권 수립 비사 레베데프 비망록 매일신문 1995.01.07

*5월17일*1946년에는 1개의 의과대학, 2개의 교원대학, 그리고 현재 3천3백37명이 공부하고 있는 1개의 종합대학이 문을 열었다.
1947년 9월1일부터 공업대학 교원대학이 문을 열 계획이며, 그 학생수는 6천3백명에 달할 예정임.

*5월19일*

이른 아침 쩨렌찌 포미치(주:스티코프)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로 첫번째군용열차를 보내고 내일 모든 대표들을 보내라고 말했다. 나는 13시에 첫 열차를 보냈다.

낮에 스티코프와 뚠킨이 도착했다. 대표를 아침에 서울로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시간은 한 시간 앞당겨졌다. 즉 서울에 5월20일 15시15분에 도착하여하지(주:주한미군사령관)를 방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9시에 출발하기로한 것이다.

*5월20일*

이른 아침 6시에 쩨렌찌가 전화하여 나를 급히 불렀다. 여기에서나, 발라사노프, 꼬르꾸렌꼬, 그리고 나머지 기술진과 비서진은 기차로 가고 그와 뚠낀은 비행기로 가기로 결정되었다. 밤에 몰르토프(주:소련 외무상)가 전화로위원회 업무에 대해 지시했다.

(주:발라사노프:소련 주일대사 역임. 제25군 정치고문. 제1, 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소련측 고문으로 참석했다.)

9시에 예정대로 평양을 출발했다. 우리 대표단을 전송하기 위하여 많은 단체와 학교의 대표가 모여들어 군중집회가 개최되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김달현이 연설했다. 조선의 브존느이(내전 당시 유명한 적군 지휘관), 우리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의 콧수염은 러시아 브존느이 같았다. 스티코프가답사를 했다. 아이들이 꽃을 선사했다. 꼬르뜨꼬프, 샤닌, 그로모프, 이그나치예프 등이 배웅을 나왔다. 모든 것이 엄숙하고 고양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주:김달현=북조선청우당 위원장)

호각이 울리고 디늘까와 작별을 하고 우리는 출발했다. 가는 도중 지나는 역마다 예외없이 깃발과 손수건을 든 학생들과 마주쳤다. 첫정차역인 사리원에서 만세를 외치며 군중대회가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사진과 꽃들이 보였으며 인민위원회 및 정당 대표들이 나와 있었다. 또다시 꽃 증정이있었고 10분간 정차…신원역에서 다시 군중대회. 소비에트대표단을 만나기위해 나온 많은 여성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축사와 꽃의 물결이 일고, 이러한 일들이 38선까지 계속되었다.

38선 이후로는 풍경이 아주 달라졌다. 첫 정거장에 기차가 들어서자 경찰이경계를 폈다. 아무도 기차에 다가서지 못했다. 이러한 광경이 서울까지 계속되었다. 오직 경찰만이 있었다. 기차가 오기만 하면 경찰이 에워쌌다. 작년에 비해 경찰의 수가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역마다 오래 머물렀다.서울역에는 45분이나 늦어 오후4시에 도착했다. 정거장 플랫폼에는 종군사진사, 영화촬영기사가 있었다. 미국 위원회측의 일원인 웨커링 장군과 랭던이마중나와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3분정도 서있었다. 광장에서는 군악대가행진곡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광장에는 도열한 경찰과 미군들 이외에는 텅비어 있었다.

(주:랭던:미군정에 파견된 미국무성 고문. 1946년 3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개최시 소련대표단은 많은 사람들의 환영속에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제2차 미소공동위 때에는 별로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우리앞에서 미군이 탄 장갑차와 지프가 선도했다. 역에서 영사관으로 가는모든 길에는 경찰이 도열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경찰들은 서로 10~15보 간격으로 서 있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서울에 왔다. 영사관에 도착하자 일류신 47호가 하늘에 보였다. 스티코프가 탄비행기이다. 시티코프는 5시에 영사관에 도착했다.

*5월21일*

2시에 덕수궁에서 공동위원회의 개막행사가 열렸다. 개막식에는 미군측 장군들과 미국, 프랑스, 중국 영사들, 그리고 우리측 연락장교들이 참석했다. 군정장관과 군정의 각 부처장, 그리고 군정내 조선인들도 참석했다. 스티코프와 하지는 포옹을 나누고, 또 다시 사진·영화 촬영이 있었다.(주: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이날 덕수궁 석조전 회의실에서 개막식을 가졌다)

*5월22일*

첫 실무회담. 의사일정을 정했다. 미국측에서는 위원회에 정당 사회단체 대표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관련 당사자들도 참석할 수 있게 하자는 제안을 들고 나왔다. (우리는)그들에 포섭된 앞잡이 정당 사회단체들을 제외하고 싶었다. 우리는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들도 그 문제에서 손을 뗐다.이어 미국측은 이전의 결정 3에서 정치강령에 대한 구상을 취소하고, 장차수립될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권력이양에 관한 새로운 항목을 설정하자고제안했다. 그들에게 불리한 정치강령을 의사일정으로부터 제외시키기 위해그들은 심지어 강령에 관한 의제에 합의된 적이 없다는 술책까지 부렸다. 그들에게 이전 회의에서 그 기록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1946년 4월27일 회의록기록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미국측의 이 수정안은 철회되었다. 
        
199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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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1차미소공위 결렬 매일신문 1995.01.07
수립할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레베데프 비망록 '의 첫 부분은 바로 이같은 제2차 미소공위의 개막에 즈음하여 서울로 향하고 있는 소련대표단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해설-공위 지지 정당·단체만 협의대상 한정 매일신문 1995-01-12
대표는 미국측에서는 웨커링, 소련측에서는 레베데프가 맡았으며 제3분과위원회 대표는 미국측에서는...소련측에서는 발라사노프가 맡았다. 따라서 레베데프 비망록에 나오는 미소공위 내용은그 상당부분이.........


http://db.history.go.kr/id/nh_052_0030_0020_0040_0020
<레베데프비망록>에는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3월 17일부터 검토된 것으로 쓰여 있다. 그리고 이 비망록 3월 24일자에는 연석회의 대회일정이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다.429)
427) <레베데프비망록>17(≪매일신문≫, 1995년 2월 11일).
428) <레베데프비망록>17(≪매일신문≫, 1995년 2월 11일).
429) <레베데프비망록>17·18(≪매일신문≫, 1995년 2월 11일·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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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es24.com/24/goods/45783207

http://dl.nanet.go.kr/SearchDetailView.do?cn=MONO1201701147_1
자료명/저자사항레베데프 비망록 : 대구, 매일신문 1995.1.1.∼2.28. 24회 연재기사 全文 : 1947.5.14.∼1948.12.26. 기록 / 김영중 편 이용률 보통
발행사항[제주] : 해동인쇄사, 2016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506734 레베데프 비망록 2016.12.30.
(1) ~ (24) 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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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keumhwa.kyonggi.ac.kr/search/detail/CATTOT000000631488?mainLink=/search/tot&briefLink=/search/tot/result?q=%EA%B9%80%EC%98%81%EC%A4%91_A_st=FRNT_A_si=2

레베데프 비망록 : 대구, 매일신문 1995.1.1.~2.28. 24회 연재기사 全文: 1947.5.14~1948.12.26 기록

표지이미지
자료유형 단행본
서명/저자사항 레베데프 비망록: 대구, 매일신문 1995.1.1.~2.28. 24회 연재기사 全文: 1947.5.14~1948.12.26 기록/ 김영중 편.
개인저자 김영중,1941-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발행처불명], 2016 ([제주]: 해동인쇄사).
형태사항 170 p.: 삽화; 27 cm.
ISBN
주제명(개인명) Lebedev, Nikolai Georgievich,1901-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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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데프 비망록 : 대구, 매일신문 1995.1.1.~2.28. 24회 연재기사 全文: 1947.5.14~1948.12.26 기록

자료유형
단행본
개인저자
김영중1941-
서명/저자사항
레베데프 비망록:대구, 매일신문 1995.1.1.~2.28. 24회 연재기사 全文:1947.5.14~1948.12.26 기록/김영중 편
발행사항
제주:해동인쇄사,2016
형태사항
170 p.:삽화;27 cm
주제명(개인명)
Lebedev Nikolai Georgievich1901-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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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1995.1.1~2.28. 24회 연재기사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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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데프 비망록」 발견 의미 : "北 정권 수립 裏面史 밝힐 단서" 부산일보 1994-12-30
청진·나남 우라늄 채굴 노려 蘇, 6·25 北남침 지원 : 金九 협상제의 역이용 부산일보 1994-12-30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1 : 인민위원 84%가 노동자·농민 부산일보 1995-01-06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2 : 北 릴레이식 군중집회로 대표단 전송 부산일보 1995-01-10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3 : 蘇의 임시정부案 47년 5월 22일~26일 부산일보 1995-01-17
전문가 해설 : 蘇 "남북대표 同數에 남측은 좌익 50% 포함" 부산일보 1995-01-17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4 : 臨政수립 문제로 金日成과 비밀면담 부산일보 1995-01-20
전문가 해설 : 共委, 본 회의·3개 분과위 구성 부산일보 1995-01-20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5 : 반탁 단체 협의 싸고 美와 논란 부산일보 1995-01-24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6 : 美와 토론 3週 간 결실없이 제자리 걸음 부산일보 1995-01-27
전문가 해설 : 反託 24개 단체 참여싸고 美蘇 갈등 부산일보 1995-01-27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7 : 美 대대적인 남한좌익 檢束 나서 부산일보 1995-02-03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8 : 蘇, 한국문제 4强國회의 회의안 거부 부산일보 1995-02-07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9 : 美, 3週 휴회 뒤 공동위 사실상 종결 제안 부산일보 1995-02-10
전문가 해설 : 보안대대본부, 인민군 창설 사전조직 부산일보 1995-02-10


북한 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10 : 蘇, 임시 헌법 제정 北韓 독자 정권 추진 부산일보 1995-02-14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11 : 蘇 "분단정권 추진" 비난 우려 憲法 보류 부산일보 1995-02-17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12 : 人民軍 창설 군사 퍼레이드만 방송 공개 부산일보 1995-02-21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13 : 공업재건·교육에 예산 집중 배정 부산일보 1995-02-24
전문가 해설 : 48년부터 체계적 산업정책 실시 부산일보 1995-02-24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14 : 천도교 시위계획 밀고로 거사 실패 부산일보 1995-02-28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15 : 金九, 北에 남북협상 제의 비밀서신 부산일보 1995-03-03
전문가 해설 : 蘇, 정권 정통성 확보 포석용 구상 부산일보 1995-03-03

북한 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16 : 북로당 2차 당 대회 48년 3월 24일~4월 8일 부산일보 1995-03-07

북한 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17 : 金日成 "金九가 와야 남북연석회의 개최" 부산일보 1995-03-10
북한 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18 : 金九 "나는 단지 金日成 만나러 왔다" 부산일보 1995-03-14


북한 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20 : 김규식, 「통일조선 미래」논의 제안 부산일보 1995-03-21
북한 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21 : 김책, "美帝·남한 쳐부술 힘 있다" 부산일보 1995-03-24
북한 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22 : 北韓 정권수립과정 내막 재현 부산일보 1995-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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