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김일성 최초의 무장 투쟁 : 조선혁명군 고동뢰(高東雷) 소대장 일행 10명 살해 한국 및 미국 자료

북한 김일성이 1931년 살해한 정모(鄭某)는 정신(鄭信)이 아니다.
이종락(李鐘洛) 체포 기사 : 1931년 동아일보

현익철 (玄益哲, 1890 ~ 1938.5.7)
유순호는 김일성 평전에서 고동뢰 소대장이 1931년 7월경 사살되었고, 후임 소대장 심용준이 김일성을 범인으로 추정하여 추적하다 현익철이 1931년 8월 31일 체포되어 추적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 - 이는 엉터리 주장이다.
현익철 피체 후 김보안(金保安, 1865~1935)이 조선혁명군 총사령이 되었으나 1931년 12월 흥경현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사. 고동뢰 소대장 피살은 후임 총사령 양세봉 때의 일임.
고동뢰 소대장은 1932년 2월 초까지 생존해 있었다.

유순호, 김일성 평전 (상), (지원출판사, 2017년 01월 25일) : 고동뢰 사건 pp.186~188; pp.225~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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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용준 (沈龍俊)은 조선혁명군 제3중대장이었고, 그 아래 1소대장이 고동뢰(高東雷)였다. 김성주는 고동뢰 소대장 일행 10명을 밤에 잠든 사이 참살하였고, 심용준 중대의 무기를 탈취해 갔다.
김성주[북한 김일성(金日成, 1912-1994)]가 1931년경 만주 무송현(撫松縣)에서 중국인 장아청(張亞靑, 張蔚華, 1913-1937) 등 또래 패거리들을 모아 군자금 명목으로 마을 주민들에게 금품을 빼앗고, 행패를 부리며 괴롭히고 다녀 원성이 높아지자, 1932년 2월에 국민부(國民府)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총사령 양세봉(梁世奉, 1896 ~ 1934) 장군이 이들을 제압하러 휘하의 고동뢰(高東雷) 소대장 이하 10명을 파견하였으나, 사전에 이를 탐지한 김성주 일당이 무송에 도착한 고동뢰 소대장 일행이 먼 길에 피곤에 지쳐 잠든 사이에 모두 살해하고 무기를 훔쳐 달아났다는 글이 인터넷에 상당히 올라와 있다. 아래는 그러한 사례의 일부이다.
이런 내용이 나오는 일제시대 당시 기록은 없고,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전 성균관대 교수의 저서 "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에 처음 나온다. 이교수는 일제시대 당시 만주에 살면서 김성주(김일성)의 행적을 직접 보고 잘 알던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하였다. 해당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p. 107] ...旺淸門에 있는 南滿洲學院(약칭 南滿學院)은 正義府 대에 세운 특수 교육기관이었는데 國民府가 발족한 이후로는 國民府가 인수해 관장하고 있었다. 독립정신을 기르고 군인으로서는 小隊長이 될 수 있는 자질, 행정으로 나간다면 自治區의 區長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교육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旺淸門에는 또 正義府가 세우고 國民府가 계속 관장했던 五년제의 化興中學校가 있었는데 李時燦씨(六三세 서울 永[]東區 거주)는 化興中學 재학 중인 一九三○년 초에 旺淸門에서 南滿學院에 와 있던 金聖柱 일행을 만났었다. 李時燦씨의 아버지 李炳根씨는 國民府의 三源浦地區 總管이었다.

    [p.108] ...그 무렵 李時燦씨는 金聖柱를 만났으며 서로 통성명하고 지냈었다. 李鍾洛이 南滿學院에 보낸 대원은 朱蒼, 崔峯, 金聖柱 등 五, 六명이었다. 이들은 一九二九년과 三○년에 걸친 겨울을 이곳에서 보낸 것이다. 그 당시 南滿學院의 책임자는 현정경(玄正卿, 1886-1941)이었는데 이 사람을 비롯하여 朴素心등 강사들이 대부분 사회주의화해서 교육내용은 反國民府的인 사회주의 교육 뿐이고 선생, 학생이 힘을 합쳐 사사건건 國民府에 반대하는 일만 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國民府 중앙(奉天省 興京縣 河南街에 있었다.)에서는 이들에 대해 체포령을 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좌우익이 충돌해 유혈참극을 빚는 일이 자주 있던 때여서 南滿學院 肅正에서도 더러는 잡혀 죽었고 더러는 도망치고 말았다. 金聖柱는 이때도 재빨리 도망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車光洙 邊晶根 등과 함께 旺淸門을 빠져 나와서 다시 孤楡樹의 李鍾洛에게로 피신했다. 南滿學院에서 탈출한 자들은 대부분이 李鍾洛에게로 피난처를 구했다. 그만큼 그는 國民府 안의 反國民府派, 이른 바 사회주의혁명파로서의 한 據點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金聖柱가 二九년 봄 毓文中學生으로서 共産서클에서의 첫 參席이 발각되어 吉林에서 도망쳐 李鍾洛部隊로 갔다가 다시 南滿學院에 갔고 그곳에서 쫓겨나 또 다시 李鍾洛部隊로 되돌아 갔던 시기에 해당되는 일을 북한에서는 『一九二九년 하반기에서 一九三○년 봄 사이에 吉林 감옥에서 옥중투쟁했고 반식민지 민족해방문제, 조선혁명노선등을 연구했다』고 경력을 날조해 놓고 있다. ...

    [pp.143~145] 張亞靑과 같이 撫松에 나타난 金聖柱는 권총을 휘두르고 다니면서 약탈의 선두에 나서 큰 문제를 일으켰다.

    金聖柱 張亞靑은 그 지방의 껄렁한 자기 또래의 젊은 것들을 긁어모아 패거리를 지어 中國 사람들 집을 털고 다녔다. 그때 金聖柱는 金一星이란 이름을 썼다. 당시 웬만한 중국 사람들은 대개 집에다 경호용의 총들을 갖고 있었는데 金聖柱 張亞靑등은 돌아다니면서 이걸 강탈해 같은 패거리들끼리 나누어 갖고 무장 작당이 이루어지자 다음에는 또 군자금 모집이다 해서 돈을 털고 다니기 시작했다.

    撫松 일대의 中國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한국놈 金一星(金聖柱) 일당의 약탈 때문에 못 살겠다는 소리가 비등해졌다. 韓中 양민족 사이에는 큰 금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一九三一년과 一九三二년 사이의 겨울 내내 金聖柱 일당의 행패는 그치지 않았다. 그때 撫松에는 張喆鎬라는 朝鮮革命軍 中隊長을 하다가 그만 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金聖柱 일당의 행패를 퇴치하지 않고서는 撫松 일대에서 韓人들이 배겨나기 어렵다고 판단, 朝鮮革命軍 본부가 있는 興京縣 旺淸門으로 급히 기별하러 갔다.

    그때 朝鮮革命軍의 總司令은 梁世奉으로 바뀌어 있었다. 一九三二년 一월 一九일에 朝鮮革命軍 總司令으로 있던 金保安(金俊澤, 1865~1935)등이 韓人 밀정의 통보로 日帝 경찰에 체포된 불행이 있어 그 후임으로 梁世奉이 총사령으로 취임했던 때이다. 張喆鎬는 梁司令에게 가서 撫松 일대의 실정을 보고하고 金聖柱 일당을 퇴치할 것을 요청했다. 張喆鎬는 당시 四三세, 본명은 張致旭,(1887~?)이었다. 그는 中日戰爭 발발 (一九三七년) 후 北京에 가서 살다가 해방후 서울을 거쳐 고향인 平北 義州로 갔다. 그 후 소식은 알 수 없으나 四男 張鳳勳이 永登浦에 살고 있다.

    梁世奉 司令은 興京과 撫松의 중간지대인 柳河縣 三源浦의 國民府總管이었던 李炳根(本章 第三節의 證言者 李時燦씨의 부친) 에게 편지를 보내 李炳根총관 밑에 있는 朝鮮革命軍 小隊長 高東雷로 하여금 金聖柱 일당을 퇴치토록 하라 했다. 당시는 滿洲事變(一九三一년 九월 一八일) 후라서 도처에 日軍들이 마음 놓고 들락거릴 때라 한인사회는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李炳根은 梁司令에게 柳河縣 자체가 日軍들 때문에 불안하니 무장병력을 撫松에까지 보내면 柳河縣의 한인사회 보호가 문제라면서 난색을 표하는 답장을 보냈다. 그랬더니 梁司令은 군인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면서 그대로 집행토록 하라는 지시를 재차 내렸다.

    高東雷 小隊長(黃海道 사람)은 권총으로 무장한 九명의 대원을 데리고 撫松으로 떠났다. 그속에는 李炳根의 아들 李時燦씨의 化興中學 동창이었던 金文彬도 끼어 있었다. 金文彬은 咸南사람으로 고향에 가족을 둔채 旺淸門에 공부하러 왔던 사람이었다. 高東雷 소대장 일행은 먼길을 오느라고 撫松에 도착했을 때엔 매우 지쳐 있었다.

    도착한 첫날 밤은 우선 푹 쉬기로 했다. 일행은 모두 한 방에서 베개 밑에 권총을 깔고 깊은 잠에 들었다. 날이 새면 金聖柱 일당을 찾아나서 그들을 무장해제해서 다시는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할 참이었다. 韓中兩民族의 친화를 해치는 일을 막고 그로써 한인사회의 안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젊은 것들이 철없이 비적떼 노릇이나 하고 다니는 것을 응징할 참이었다.

    그러나 불행은 高東雷 소대장 일행이 撫松에 도착한 것을 金聖柱 패들이 탐지한 데 있었다. 金聖柱 패들은 한밤중에 곤히 잠든 高東雷 일행의 잠자리를 습격하여 一○명을 몰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獨立軍인 朝鮮革命軍의 귀중한 병력의 한 부분이 치안 확보차 출동했다가 金聖柱에 의해 살해된 끔찍한 사건이었다. 金聖柱 일당은 베개 밑 권총들을 모조리 거두어 달아났다. 이 사건을 저지르고 나서 金聖柱 일당은 撫松 지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一九三二년 二월 께의 일이다 [30]. 그 후 이 해 여름까지 金聖柱의 발자취를 말해 주는 자료도 증인도 없다.
    [30] 李時燦 (本章 第三節 參照) 證言

이러한 내용은 책으로 출판되기 전에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는데, 당시 중앙일보 기사(1974년 4월)는 아래와 같다.



백파(白波) 김학규 (金學奎, 1900 ~ 1967) 장군의 백파 자서전(白波 自敍傳)에 김성주(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이 국민부로 통합되기 전의 정의부(正義府)에서 활동한 적이 있으며, 김성주에게 정의부(正義府)에서 학비(學費)를 공금(公金)으로 주어 길림(吉林) 육문중학(毓文中學) 2학년(學年)까지 공부를 시켰다고 하는데, 김성주는 이런 은혜도 저버리고, 고동뢰 소대장 일행을 살해한 것이다.


김일성이 양세봉 장군에게 투항할 당시의 사정
김일성 회고록의 진실 (7) 남만(南滿)과만 동만(東滿)이동에 얽힌 이야기(1932~1933) bluetoday 2012.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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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증언을 한 분들이 일부러 이런 말을 지어냈을 리는 없으니 사실로 볼 수 있지만,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의 증언이라 기억이 정확한지 검토해 볼 필요는 있다. 이명영 교수가 증언을 채록할 1974년 당시는 독립운동에 관한 기록들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을 때라 증언에 나오는 고동뢰(高東雷) 소대장 이하 여러 사람들은 생소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일제시대 자료들이 정리되어 인터넷에 올라 있으므로, 증언에 나오는 인물들이 과연 당시에 그러한 장소에 있었는지는 어느 정도 검색해서 확인해볼 수 있고, 실제로 증언 내용과 상당히 부합하므로, 위의 증언은 사실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이다.

고동뢰(高東雷) :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삼원포 지부 소대장
증언에는 그가 길림성 통화시 유하현(吉林省 通化市 柳河縣) 삼원포(三源浦)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래 독립기념관에서 올린 한국독립운동사 51권에 조선혁명군 삼원포(三源浦) 지부 소대장으로 고동뢰(高東雷)가 나온다. 양세봉 장군이 아직 조선혁명군 총사령이 아닌 유하현 제3중대장인 것으로 보아 위 사건이 일어나기 조금 전의 자료로 보인다. 자료의 원출처는 통화현당안관(通化縣檔案館)  소장문서 "檔案民1號 全宗 1號目錄870號, 「鮮匪國民府ノ現況」"이다. 따라서 삼원포(三源浦)에 조선혁명군 소대장으로 고동뢰(高東雷)라는 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1932년 2월 이후 다른 활동 기록은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김일성 일당에 의해 피살된 탓으로 보인다.

한국 독립 운동의 역사 제51권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 제1장 국민부의 성립과 활동 / 3. 국민부의 성립과 초기 조직

[註 39] 국민부 및 조선혁명군의 편제와 간부들의 명단 직책은 다음과 같다(通化縣檔案館 통화현당안관 소장문서 檔案民1號 全宗 1號目錄870號, 「鮮匪國民府ノ現況」).
一. 본부 소재지 : 신빈현 하남가(河南街 外新賓縣內)
*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梁仁元(梁荷山 : 본명 梁基瑕)
동위원 : 李鐘乾·張承彦·高而虛·李時烈·李一世·朴圭洙·金杜七·金桓·劉東錫·金學奎·金燉
길림지방 독립대장 金履大, 흥화지방 집행위원장 朴春琴
* 혁명군 사령장 김보안(金輔安, 金寬戎 : 新賓縣 河南街 苗河淸에 있음)
부사령장 張世湧·尹赫, 제1중대장 黃基淸·副官 李海雲, 소대장 金東長·權泰植
一. 지부
1. 환인현 및 집안현내
환인지방 집행위원장 鮮于雄, 동 경무집행위원장 李相觀(李相寬), 집안지방 집행위원장 金溢天(신임)·劉光屹(구임), 동 경무집행위원장 張世翰(신임)·朴金校(구임), 혁명군 제4중대장 姜玉成 부관 崔炳棋 소대장 張道伯
2. 통화현 특별구
특별구 집행위원장 鄭在明(신임)·宋明奎(구임), 동 경무집행위원장 琴南
3. 청원현
淸原지방 집행위원장 權洛容 동 위원 鄭順喆, 동 경무집행위원 金洛玄·金昌善·李炳浩
4. 撫本지방(永陵街 혁명군은 淸原縣지방으로 이동함)
撫本지방 집행위원장 金永傑, 혁명군 제2중대장 田雲鶴(南山城子 정미소) 부관 朴致華, 동 소대장 金永華 金鉉宇
5. 유하현
유하지방 집행위원장 宋憲 동 위원 姜允杰, 同 경무집행위원장 李炳浩 동위원 朴永勳·鄭相元·金禮三·田秋·李學斗, 중국측 연락원 朴永善(朴利木, 柳河公安局 통역), 혁명군 제3중대장(在 孤山子, 양세봉), 同 소대장(재 三源浦) 李永樂·車用陸·高東雷, 중앙집행위원(在 三源浦) 고이허


延邊檔案館 韓國 關聯資料 現況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해외사료총서 09권 중국 소재 한국사 자료 조사보고 Ⅰ


국회도서관 자료
外務省警察史(在滿大使館第一 : 昭和七年八月-九年二月)
p.351 : 차용륙 소대장 검거
p.362 제3중대 중대장 심용준, 제1소대 소대장 고동뢰 (p.339와 그 앞에 별지 표 제2호에 대한 설명 나옴.) 
p.875 : 1932년 가을 제3중대 중대장 심용준, 고동뢰는 없고 제1소대장은 다른 사람임.

p.362의 표에는 양세봉 장군이 최고 군지휘관인 것으로 보아 위의 통화현 당안관 문서보다 약간 후의 기록이며 1932년 초의 편제로 추정된다. p.875의 1932년 가을 가록에는 고동뢰 소대장이 나오지 않으며, 이후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으므로, 1932년 2월에 김일성 일당에게 피살 당했다는 증언은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087400、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州国ノ部/南満特委関係 第二巻(I-4-5-2-1_22_3_002)(外務省外交史料館)」
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州国ノ部/南満特委関係 第二巻 5.鮮人共産党関係
1933년 5월 17일 자료
p.12, p.23 조선혁명군 제3중대 심용준 중대장 아래 고동뢰 소대장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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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근(李炳根) :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의 국민부 총관(國民府 總管) 
이 분은 김성주의 일을 이명영 교수에게 증언한 이시찬(李時燦, 1974년 당시 六三세, 서울 城東區 거주)씨의 부친이다. 조선혁명군 자료에는 이름이 잘 찾아지지 않으나, 아래 지료를 보아 1922~23년께 대한통의부에 관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통의부는 후에 국민부에 통합되므로,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 삼원포(三源浦) 총관을 지냈을 가능성은 있다.

大韓統義府 中央議會 議決文 公布 : 1923년 02월21일

大韓統義府의 第一回 中央議會 經過 : 독립신문 제156호 1923년 03월 01일
桓西에 朴圭항, 孫昞憲, 桓南에, 李基●, 輯西에 李東煜, 金宮鳳, 輯東에 田世用, 許京俊, 皇城에 金用圭, 張燦京, 靑山에 高碩福, 宋佐濂, 通南에 洪基柱, 申浩永, 輯北에 崔文浩, 宋相翊, 通東에 鄭●洞, 桓與에 李仲彬, 金文典, 仁西에 金基浩, 寬北에 崔京祿, 通北에 金淇東, 朴世鎭, 京北에 崔仁德, 桓東에 朴奎洙, 方直寶, 寬東에 韓允煥, 寬南에 金네振, 李衡甲, 寬西에 康濟河, 華陽에 洪●圭, 柳河에 韓圭碩, 申允淡, 李應濂, 柳西에 李益華, 李炳根氏 等 三十五人의 地方代議員과 祕書課長 高豁信, 民事部長 李雄海, 實業部長 邊昌根, 法務部長 玄正卿, 學務部長 申彦甲 交通部長 吳東振, 交通局長 黃東浩 檢務監 金信澤, 高東昊, 金觀聲氏 外 各部職員及將校 二十九人과 桓西에 車應燁, 桓南에 裴學端, 輯西에 金吉甫, 輯東에 鄭得永, 部南에 朴永采, 仁西에 金益浩, 寬北에 申仲執, 通北에 韓鎭燮, 桓東에 崔(확인요한자: 木+頁)彬 寬東에 鄭碩泰, 寬南에 李用植氏 等 十一地方의 總管과 各地 有志人士 五十餘人의 傍聽者가 有하엿슴


大韓統義府中央會議에 관한 건 : 1923년 03월15일

不逞鮮人의 要求金 및 在住 鮮人 등의 被害金 : 1922년 07월07일
p.5 피해자 李炳根 유하현(柳河縣) 向陽鎭 거주

大正十年中에 있어서 管內 不逞鮮人의 狀況 : 1922년 02월24일
p. 70 장백현 李炳根, p.55 백광운

대한통의부 [大韓統義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성주 일당이 살해한 고동뢰 소대장 일행 속에는 이병근(李炳根)씨의 아들 이시찬(李時燦)씨의 화흥중학(化興中學) 동창이었던 김문빈(金文彬)도 끼어 있었다고 하므로, 이시찬씨는 이 일에 대해 잘 기억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증언도 정확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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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호(張喆鎬, 본명 장치욱[張致旭]) :  朝鮮革命軍 中隊長을 하다 그만 두고 무송현(撫松縣)에 거주
김성주(북한 김일성) 패거리들이 무송에서 계속 행패를 부리자 양세봉 장군에게 이들을 진압해줄 것을 요청한 사람이다. 1990년에 독립유공자로 보훈처의 서훈을 받았다. 4남 장봉훈(張鳳勳)씨가 영등포(永登浦)에 거주했는데, 이 일에 대해 이명영씨에게 증언을 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인물자료에서 그의 고향이 이명영의 김일성 열전에 나온대로 평북 의주(義州)인 것이 확인된다. 보훈처 자료에는 그가 해방전인 1945. 2. 2에 졸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아들 장봉훈씨의 증언으로는 해방후 고향 의주로 갔는데 그 후 소식은 모른다고 했다.

장철호(張喆鎬, 189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철호(張喆鎬, 1892. 2. 6~1945. 2. 2) : 보훈처 공훈록
장철호(張喆鎬, 1892. 2. 6~1945. 2. 2) : 보훈처 공훈록
장철호(張喆鎬, 1892. 2. 6~1945. 2. 2) 독립장(1990)
장치욱 (張致旭, 張喆鎬, 1887~?) 52세(1939년 현재) - 국사편찬위원회 인물자료
『1925년 7월 현재 正義府 상황』 : ...金錫夏朱夏範張喆鎬金昌憲


소화 6년 1월 19일 (길림 주재 석사(石射) 총영사 발신, 폐원(幣原) 외무대신 앞) 소화 5년 길림 지방 조선인 사정에 대한 건 / 불온단체(不穩團體) 1. 국민부(國民部) / 2. 본 국민부원의 남만한인청년총동맹 반동 간부 암살 독립운동사자료집 10 독립군전투사자료집 / 일본 외무성 보존 문서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6) p.476 : 공훈전자사료관
길림(吉林) 거주 및 출입 불령 조선인 조사
장철호(張喆鎬) 44세 평안북도 의주군 / 길돈선교하(吉敦線蛟河)
전 정의부 및 국민부(제2, 4대장) / 주소지에서 윤 과부와 동거



張喆鎬는 당시 四三세, 본명은 張致旭,(1887~?)이었다. 그는 中日戰爭 발발 (一九三七년) 후 北京에 가서 살다가 해방후 서울을 거쳐 고향인 平北 義州로 갔다. 그 후 소식은 알 수 없으나 四男 張鳳勳이 永登浦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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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國史館論叢 第8輯 > 梁世奉 : 朝鮮革命軍 總司令의 硏究(丁原鈺)
丁原鈺, 國史館論叢 第8輯, 국사편찬위원회,1989-12-20


장세윤(張世胤), 국민부(國民府) 연구(硏究) : 성립 및 헌장, 자치활동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2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8.12, 83-124 (42 pages)
: 고동뢰(高東雷, 주42) 및 장철호씨가 나옴.

國民府 硏究 : 성립 및 현장, 자치활동을 중심으로
國民府 硏究 : 성립 및 현장, 자치활동을 중심으로
저자명 장세윤(張世胤)
문서유형 동향/연구보고서
간행물 한국독립운동사연구
발행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8년

국민부(國民府) 연구(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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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현 삼원포와 무송현의 위치


아래 이미지는 클릭하면 확대됨. 지도의 오른편 아래에 백두산과 평안북도가 나와 있고, 백두산에 인접하여 북서쪽으로 푸쑹현(撫松県)이 있다. 왼쪽 동그라미가 있는 불그스럼한 부분이 유하현(柳河縣), 오른 쪽 동그라미 있는 곳이 무송현((撫松縣)이다. 유하현 남쪽 삼각형 표시된 곳이 삼원포 조선족진이다.



신흥무관학교 연혁 -> 경희대학으로 바뀜.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신흥강습소 설립 (1911.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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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국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 자료에도 1932년 2월 조선혁명군의 황규청(黃奎淸)이란 자가 일본에 투항하여 그 주구 노릇을 하자 고동뢰 소대장 일행이 황규청을 총살했다고 나온다. 이 일이 있은 직후 고동뢰 소대장은 무송에서 행패부리던 김성주, 장아청 패거리를 제압하러 갔다가, 김성주에게 화를 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3권 한국독립당 Ⅰ > 기관지 > 『震光』 > 『震光』 제6호(1934년 9월호)

....그리고 同年(1932년) 2月 上旬에 柳河縣 境內에 駐屯이든 朝鮮革命軍 第3中隊 副官 黃奎淸이란 놈이 該 中隊長 沈龍俊 同志가 出他한 機會를 타서 敵에게 投降하고 走狗가 되어, 通化 倭領事에 가서 走狗輩 及 日僞軍警을 몰고 上記 柳河駐屯地로 드러가서 自己가 親手로 經理하던 武器 一部 20餘柄을 들추어 倭敵에게 주엇으며, 또 該隊 小隊長 車用陸 駐屯當所를 襲擊하야 車隊長 以下 兵士同志 李秉學 · 崔鎭英 · 白○○ 等 6名이 被逮되엿는데, 上 車用陸 同志는 被捕當時 飛彈에 中擊되야 面部가 破裂重傷되엿는데, 上 同志는 本來 運動線에 十餘 星霜의 아름다운 歷史를 所有햇음으로 朝中人士가 欽佩하던 터이라. 놈들 없는 짬을 타서 自己 面部傷處에 鮮血이 흐르는 肉塊와 骨碎를 뜯어내어 白紙上에 ‘朝中民衆은 合作하야 抗日하자’는 等 數 十種의 血書를 서서 各 中國人士에게 돌려 주엇다. 本來 9 · 18事變에 刺戟을 받은 中國人士들의 腦海에는 비록 外族일망정 敵手에 끌리여가는 立場과 環境이 同一한 사람의 告別의 血書를 받은 그 刹那 사이의 感慨無量한 쎈쎄이슌을 禁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可想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上 走狗 黃奎淸은 興京縣에서 第3中隊 小隊長 高東雷 一行의 義彈에 銃殺되엿다.

 同年 同月 上旬, 興京 某 地方에 朝鮮革命軍 第2中隊가 駐屯한 것을 敵이 알고 不意에 包圍襲擊하야, 該 中隊長 田雲鶴은 軍隊와의 距離를 멀리 두고 單獨히 事務를 보다가 不幸히 잡히엿고, 該 小隊 隊長 崔允龜가 部隊를 領率하고 敵과 應戰하야 敵方에 數十名의 死傷을 내여주엇고, 그리고 놈들은 桓仁 · 通化 · 興京 · 輯安 · 寬甸 · 臨江 · 撫松 · 濛江 · 柳河 · 淸原 · 海龍 · 撫順 · 本溪 等 各地에서 大活動을 施하야 우리 同志 7~80名의 死傷을 내인 바 있엇다. 以上의 記事는 中國 東北 3千萬, 아니 中國 4萬萬 大衆의 뼈저린 9 · 18慘變을 비롯하야 그 一環的 關係를 가진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가슴 아픈 慘變을 가져다 준 것인 同時 本黨에 對한 一大恐慌期의 歷史 페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繼續)

4267年 9月 25日 震光社 發行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震光 · 朝鮮民族戰線 · 朝鮮義勇隊』(韓國獨立運動史 資料叢書 第2輯), 1988, 129~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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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호(張喆鎬, 1892~?) 사진
아래 사진 맨 위 왼편이 장철호씨
둘째 줄 왼편 도산 안창호 선생, 오른 편 손정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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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2.pdf : 국민부 - 조선혁명군 조직표  pdf 파일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13081236300、最近支那関係諸問題摘要 下巻 (第64議会用)(議AJ-47)(外務省外交史料館)」
最近支那関係諸問題摘要 下巻 소화 7년 12월 - 전체 목차 나옴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13081238100、最近支那関係諸問題摘要 下巻 (第64議会用)(議AJ-47)(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第7編 在満朝鮮人関係諸問題/分割3
조혁군 제3중대장 심용준 아래 제1소대장 고동뢰
第二号表 国民府役員氏名表 (表)所属 役名 氏名 国民政府中央執行委員会 委員長 高而虚 〃 副委員長 梁瑞鳳 〃 同 梁河山 〃 委員 金東耳 〃 同 金浩石 国民府中央執行委員会 委員 金計七 〃 同 池永奎 軍事執行委員会 委員長 梁瑞鳳 副委員長 梁河山 参謀長 金東石 秘書副官 金声太 副官 金麗俊 参謀部附 尹一坡 軍法委員 金東耳 同秘書 金計七 翻訳 辺光都 護衛隊長 李允? 第一中隊 姜玉成 同第一小隊 李永傑 同代二小隊 金相奎 同第三小隊 金永吉 第二中隊 趙化善 第一小隊 張明道 同第二小隊 崔允亀 同第三小隊 金某 第三中隊 沈龍俊 同第一小隊 高東雷 同第二小隊 同第三小隊 第四中隊 朴大浩

標題:第7編 在満朝鮮人関係諸問題/分割2
분할 2 : p.72 재만조선인 불령행동 정의부 etc. 1931년 가을 김보안등 체포
p.83 이청천
p.91 남만지방 검거 선비 씨명표 : p.92 차용륙 1932년 2월 8일 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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