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일성이 진짜라는 유일한 근거 사상휘보는 사실은 가짜라는 증거이다. 김일성 행적 자료 정리

사상휘보(思想彙報, 1939년)의 혜산사건(惠山事件) 기록
朝鮮人ノ現在ノ動向ニ就テ (1944년)


사상휘보 제20호 (1939.09.01)에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로군 제2군 제6사(第1路軍 第2軍 第6師)는 사장(師長)이 김일성(金日成), 정치위원(政治委員)이 위민생(魏民生)으로 나오며, 6사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인 것처럼 기록했다.
이종석이나,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중국어 인명사전에 위민생(魏民生)이 위증민 (魏拯民, 1909 ~ 1941.03.08)의 다른 이름이라 하였다. 아래는 이것이 맞다고 보고 사상휘보 기록의 문제점을 논의한 것이다.

그러나 아래 일본 외무성 자료에 위증민은 1936년 겨울 항련 제2군장 왕덕태(王德泰,1907~1936)가 전사하자 동군 정치위원으로 제2군장 대행을 맡았다. 따라서 위증민은 당연히 제2군 산하 6사 사장 김일성보다도 상급자이다. 위민생을 제6사 정치위원이라고 한 사상휘보 기록은 잘못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아래 논의는 잘못된 것으로 보이지만 참고로 하기 위해 삭제하지 않고 그냥 둔다.

주보중(周保中)의 동북항일유격일기(东北抗日游击日记) p.16 하단 주석 (2)에 위민생은 위증민이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위증민은 당시 6사장 김일성의 상관인 제2군장 대리를 맡고 있었으므로, 위민생이 6사 사장 아래 정치위원이라고 한 사상휘보 등의 기록은 잘못된 정보를 기록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위 동북항일유격일기의 같은 부분에 2군 2사의 사장으로 김일성이 나오고, 정치위원은 위민생 아닌 조아범(曹亞範, 曹亚范, 1911 ~ 1940. 04. 08)으로 나온다. 이것이 맞고, 사상휘보의 기록이 오류로 보인다.


근거 : 支那及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 (1934~1938) : 일본 외무성 동아국 업무보고
1935년, 1937년, 1938년 자료에 위증민의 직책이 나온다.

아래 기록에도 제2군장 왕덕태(王德泰,1907~1936)는 1936년 10월 20일경 전사하고, 위증민이 제2군장으로 취임하였다고 나온다.

    자료번호 1-006466-001-0440
    주제목 간도(훈춘현 포함) 및 접경 지방 치안 정황 보고(1937년 5월중)
    원제목 昭和十二年五月中 間島(琿春縣ヲ含ム)及接壤地方治安狀況報告ノ件
    수신자 외무대신 광전홍의(廣田弘毅)
    발신자 재간도 총영사 천촌박(川村博)

    p.7 제2군장 왕덕태는 1936년 10월 20일경 전사
    p.8 제2군장 위증민 취임, 1937년 4월 24일 제4사장 주수동(周樹東) 전사, 후임 사장 전주인(全住仁), 4사 1단장 최현(崔賢), 제2군 제5사 제5단 方振聲
    제6사장 김일성 부대 - 5월 20일 함남 갑산군 보천면 포태리 (咸南 甲山郡 普天面 胞胎里)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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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번호 1-006466-001-0379
    주제목 관할구역내의 항일연군 검거 상황(1936년 10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원제목自昭和十一年十月一日至十月十日 管內ニ於ケル共匪檢擧狀況
    부제목
    수신자
    발신지간도
    발신자재간도 총영사관 경찰부

    p.2 중공당 동만특위 만인 위민생

위증민이 보천보 김일성의 하급자라는 아래 주장은 문제가 있어보이나, 그렇다고 보천보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될 수는 절대로 없다.

참고 : 보천보 사건 주역 2군 6사장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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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1937년 6월 4일 밤 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2군(二軍) 6사장(六師長) 김일성(金日成, 1901~1937.11.13)은 위증민 (魏拯民, 1909 ~ 1941.03.08)의 상급자였고, 제2방면군장(第二方面軍長)이었던 북한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은 위증민의 하급자였다. 그러므로 두 김일성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 즉 북한 김일성은 남의 공을 가로챈 가짜이다.

근거 :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며 제6사장이었다는 근거문헌으로 널리 인용되는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1939.09.01)의 혜산사건(惠山事件) 기록, 그 외 사상휘보 제14호(1938.03.01), 제18호(1939.03.01); "吉林、間島、通化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 14年(1939) 10月~16年(1941) 3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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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6월 4일밤 보천 사건을 일으켰던 보천보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사살되었다. 자신이 보천보 사건의 주인공인 것처럼 주장하는 북한의 김일성은 남의 공을 가로챈 가짜인 것이 명백하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은 해방후 입북하여 평양 시민들앞에 처음 나선 순간부터 알려졌고, 월남민들에 의해 남한에 까지 전해져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학생 시위를 주도하던 주사파 종북 세력들이 사회 각계의 주도층이 되면서 어느새 학계에서 조차 김일성은 진짜로 둔갑해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이종석 등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유일한 근거 기록은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朝鮮總督府 高等法院 檢事局 思想部)에서 1939년 9월 1일자로 간행한 사상휘보(思想彙報, 1939년)의 혜산사건(惠山事件) 기록이다. 이들이 인용하는 부분은 보천보 사건의 주역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
    "함남 국경지대 압록강 일대에 할거하고 있는 이른바 김일성일파로 칭하는 무장단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로서 김일성(金日成)을 사장, 위민생(당시 2군 정치위원이었던 중국인 위증민의 다른 이름 - 인용자 주)을 정치위원으로 하는 조선인과 중국인 혼합의 무장단이며 김일성의 신원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으나 본명 김성주 (金成柱), 당 29세,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고평면(古坪面) 남리(南里) 출신으로서 어렸을 때 실부모를 따라 간도(間島)방면으로 이주하여 이 지방에서 성인이 되어 무장단에 투신한 조선인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하며....[그의 실모(實母)는 생존해 있는 모양이다.]"

    이종석의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p.447 의 번역문 인용. (마지막 적색 부분 제외).
라고 한 것이다. 이 사료는 이종석 이전에  김창순(金昌順, 1919-2007)씨가 1977년에 처음 발굴해 낸 것으로, 부정확한 말도 많이 있지만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金成柱)라 한 것과 그의 출신지가 북한 김일성의 출신지와 동일하기 때문에 전후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얼핏 보면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라는 근거가 될만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가 아니라 김성주(金聖柱)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한편 그 동안 김일성의 신원 기록에만 주목하 나머지 앞부분의 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로군 제2군 제6사(第1路軍 第2軍 第6師)는 사장(師長)이 김일성(金日成), 정치위원(政治委員)이 위민생(魏民生)이라고 한 것은 간과되어 왔다. 하지만 이것도 대단히 중요한 말로, 얼핏보면 알기 어려우나, 정치위원 위민생이 바로 이종석 본인이 지적한대로 위증민 (魏拯民, Wei Zhengmin, 1909 ~ 1941.03.08)의 다른 이름인 것이 문제이다. 위증민은 항일연군 시절 여러 가지 이름을 썼다. (魏拯民 + 魏民生 으로 Google 검색을 해보라.)
    原名 关有维,字 伯张,化名 魏民生、魏明胜、魏锄耕、李新良、张达、冯康 等
    (原名 關有維,字 伯張,化名 魏民生、魏明勝、魏鋤耕、李新良、張達、馮康 等)
일본 측은 위증민(魏拯民)의 拯을 글자 모양이 비슷한 極으로 잘못 알고 줄곧 위극민(魏極民)으로 표기하였으나, 항일연군에 위극민(魏極民)이란 인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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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사건 판결서 (惠山事件 判決書) : 1941년 8월 28일 함흥지법

혜산사건 판결서에 6사장 김일성 아래 정치위원으로 위극민(魏極民)이 나온다. 위민생과 동일인인 위증민을 말하는 것이다.

金日成 將軍 凱旋記 / 韓載德 著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 : 혜산 사건 판결서 번역문이 들어 있다.

p.207 (부록 p.7) 1936년 11월경부터 1937년 1월경까지의 사이 만주국 통화성 장백현 심산중에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6사장 김일성 (일명 김성주) 급 동사 정치위원 魏極民 등과 누차 회견하고 동인 등으로부터...
p.218 (부록 p.18) : 전기 김일성 일명 김성주 위극민 양명으로부터...
p.240 (부록 p.40) : 김인욱 부대 110명과 조우. 일제사격(一齊射擊)을 하여 上等兵 中澤 등 5명을 射殺하고 下士 이하 7명에게 銃創을 입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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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위증민은 제6사 정치위원으로 서열상 제6사 사장인 김일성의 아래라는 것이다. 즉 보천보 사건의 주역 김일성은 항일연군내 서열이 위증민 보다 높았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1912~1994)은 항일연군 시절 서열이 위증민보다 아래였고, 그보다 위였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렇다면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일 수 밖에 없다. 즉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당사자가 맞다는 주장의 가장 유력한 근거가 된 문헌이 사실을 알고 보면 보천보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가장 확실한 근거로 뒤바뀌게 되는 것이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보천보 김일성(金日成 1901~1937. 11. 13)의 신원(身元)에는 그가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온 인텔리였다고 했으므로 위증민보다 서열이 높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사상휘보의 위 글 바로 앞에는 魏民生의 상급자로 魏極民(魏拯民의 착오)이 나온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다른 인물로 오인한 것이다. 위민생은 1937년 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항일연군 2군 6사 김일성 사장아래 정치위원을 하다, 위 사상휘보가 간행된 시점인 1939년에는 魏拯民으로 개명한 것이다. 그동안 지위도 더 높아진 것이고. 아래의 사상휘보 이전 호에는 2군 6사 정치위원 위민생만 나오고, 魏極民(魏拯民)은 나오지 않는다. 위증민의 이름은 시기에 따라 자주 바뀌며, 1935년경에는 풍강(馮康)이란 이름을 썼다.

위 기록에 김일성의 출신지가 북한 김일성과 동일하게 나온 것은 1939년 당시 북한 김성주가 김일성이란 이름을 칭하고 다녔기 때문에 죽은 보천보 김일성과 동일 인물로 착각한 탓으로 봐야 할 것이다. 김성주가 金日成이라 칭하고 다닌 것은 위 사상휘보 기록보다 1년 이상 앞선 1938년 6월 1일 기록에서부터 확인된다. 또한 1939~1940년 간의 김일성 귀순 공작 기록을 보아도 당시 일제 경찰 측은 김일성(김성주)의 정확한 신원을 파악하고 할머니 이보익과 왕년의 상관 이종락, 지인 박차석 등을 동원하고 있었는데 위 사상휘보도 이러한 시기에 간행되었으므로 김성주를 보천보 김일성으로 혼동한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김성주가 쓴 金日成이란 이름은 유명했던 죽은 전임자의 이름에서 가져왔다는 기록이 많다.

이명영 교수는 김일성 열전에서 1로군 2군 6사장이었던 보천보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고, 그 후의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도 북한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보천보 김일성이 전사한 것은 맞지만, 1938년 11월에 동북항일연군 개편 후 1로군 제2방면군장이 된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때 1로군 총사령(總司令) 양정우(楊靖宇, 1905~1940.2.23) 다음의 부사령(副司令)이 위증민(魏拯民, 1909~1941.03.08.)이다. 1940년 2월 양정우가 전사하자 부사령 위증민이 1로군 총사령 대행이 되었다. 제2방면군장이었던 북한 김일성은 당연히 위증민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제6사의 사장이 김일성, 정치위원이 위민생이라는 것은 사상휘보의 이전 호들에도 보인다. 사상휘보는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의 "원문자료실"에서 볼 수 있다. [페이지는 tif 파일의 것이며, 괄호안이 원문에 적힌 페이지임]

위 사상휘보 14호 (1938.03)와 18호 (1939.03)에는 장백현에 근거를 둔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6사가 오성륜 (吳成崙, 1900~1947 ?) = 전광(全光) 등이 조직한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 김일성(金日成)의 4촌형(從兄) 김성보(金成甫)가 관련되었다는 반일회(反日會) 등을 규합해 항일전선 통일 운동을 기획한 일에 대해 자세히 나온다.
위 단체들은 보천보 사건에 직접 연루되었다. 북한 김일성에게는 4촌형이 없고, 오성륜(전광)도 항일연군에서 북한 김일성보다는 훨씬 지위가 높았고 12년이나 연상이므로 당시 24세에 불과했던 북한 김일성이 여러 단체를 규합하고 보천보 사건을 일으키는 일을 주동했다고 보기에는 주변 상황도 전혀 맞지 않는다.

나중에 동북항일연군 1로군이 개편된 후 제2방면군장이 된 김일성 (북한 김일성)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 10월 23일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한다. 하지만 상관인 위증민의 허락도 받지 않고 도주했으므로 소련에서 주보중 등 상급자들의 심한 질책을 받는다.
이듬해 1941년 4월경 위증민을 찾아오라는 명을 받고 다시 만주로 왔으나 이때는 위증민은 이미 사망한 후이므로 찾지 못하고 소련으로 다시 돌아갔다.

아래 일본군 노조에(野副) 토벌대 자료에 1940~ 1941년 당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조직표가 나오며, 부사령이 위증민(총사령 대행), 그 아래 제2방면군장으로 김일성이 나온다.

아래 자료를 원사이트에서 검색하자면 검색어보다 Reference code로 하는 것이 쉽다.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B02032043000、満州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匪賊動静並討伐状況関係 第四巻(A-6-2-0-2_8_1_004)(外務省外交史料館)」

件名標題:10 昭和15年9月26日から昭和15年11月12日

p.14부터 1940년 10월 23일자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조직표가 나온다. 이때는 총사령 양정우 전사 후로, 부사령 위증민(魏拯民)이 총지휘자였고, 제2방면군장 김일성, 나이 29세.

이미지 클릭 확대.





아래 동북항일연군 1로군 조직표에는 1941년 3월까지 토벌된 지휘관들이 표시되어 있다.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71220200、吉林、間島、通化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防衛省防衛研究所)」
최종 토벌 성과표에, 양정우 사후 1로군 총지휘자였던 위증민 (魏拯民, Wei Zhengmin, 1909 ~ 1941.03.08)도 토벌(X 표시)되었다고 나오므로 그의 사후에 작성된 것이다. 위극민(魏極民)으로 이름이 잘못 적혀 있다.


1로군 부사령 위증민은 1941년 3월 8일에 전사했다고 아래 노조에 토벌대 명령서에 나온다. 제2방면 군장 김일성은 상관인 위증민의 허락 없이 1940년 10월 23일 국경 넘어 소련으로 도주하였다.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50338200、野副討伐隊冬作命綴4/5 昭和16年1月6日~16年3月1日(防衛省防衛研究所)」
件名標題 : 野討冬作命第19号 野副討伐隊命令 3月9日
資料作成年月日 昭和16年3月9日 (1941년 3월 9일)
나가시마 공작대가 1941년 3월 8일에 1로군 부사령 위증민 이하 8명을 섬멸했다고 하였다. (三月八日長島工作隊ハ樺甸県夾皮溝北方地区ニ於テ第一路軍副司令魏極民以下八名ヲ殲滅セリ). 김일성비 토벌을 중점 지향한다(金日成匪討伐ニ重点ヲ指向スベシ)고 하여 그가 작년 10월말 소련으로 도주한 사실은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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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가 보천보 김일성이 맞다는 기록과 증언
김성주는 보천보 김일성이 아니라는 기록과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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