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첫 무장활동은 조선혁명군 심용준 (沈龍俊) 중대 무기 약탈 한국 및 미국 자료



심용준 (沈龍俊)은 조선혁명군 제3중대장이었고, 그 아래 1소대장이 고동뢰(高東雷)였다. 김성주는 고동뢰 소대장 일행 10명을 밤에 잠든 사이 참살하였고, 심용준 중대의 무기를 탈취해 간 적도 있다.


세기와 더불어 7권 19장 2절 : 족제비 사냥군 - 심룡준
심룡준이 김형직과 친구라서 김일성과도 잘 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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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용준 (沈龍俊, 1898~?) : 1998년 독립장 추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심용준 (沈龍俊, 1896.05.10~1949.08.03)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심용준 (沈龍俊, 1896.05.10~1949.08.03) 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심용제 (沈龍濟, 沈龍俊, 1889-10-06~?) 용의조선인명부 - 조선혁명군 제3중대장

자료번호: 1-004948-000 / 자료제목: 심용준 회중시계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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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 포상자 명단
  • 1998.08.14
  • 동아일보
  • 11면
  • 사회
  • 기사(발표 명단)
▼건국훈장 대통령장=金擎天(김경천) ▼독립장=金容成(김용성) 金燦洙(김찬수) 朴士化(박사화) 沈龍俊(심용준) 車千理(차천리)▼애국장=姜士文(강사문) 郭麟祚(곽인조) 金鍵哉(김건재) 金敎元(김교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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匪首, 金日成의 生長記, (二) 滿鮮日報 1940/04/18, 6면
비명(匪名)『김일성(金日成)』을 습명(襲名)
중학(中學)을 중퇴(中退)하고 18세(十八歲)부터 녹림생활(綠林生活)


김일성이가 전기한 바와 갓치 중학교 四학년 재학중에 ,,,,,,,으로부터 ,,,,담임선생으로부터 공산주의 선전을 받어 어려서부터 사상적 훈련을 받았고 졸업기를 압흐로 二개월을 남겨두고 그의 三촌 형권이가 서대문 감옥에서 사망하게 됨에 더욱 급격히 사상이 과격해져서 영문학교에서 중도퇴학을 당하고는 자기의 조모인 리반석(李盤石)이가 거주하고 있는 안도현을 거쳐 남만으로 가서 당시 정의부(正義府) 계통인 남만청총(南滿靑總) 간부이었던 리종락(李宗洛), 박근원(朴根源), 신영근(申榮根), 박단석(朴旦石) 등과 손을 맞잡고 결의형제가 되어 활동하고 잇엇스니 김일성의 나이는 그때 十七세 이엇섯다. 이때부터 김일성의 활동 무대는 남만이엇스나 조모가 간도성 안도(安圖)현에 거주하고 잇엇던 관계로 자조 간도에도 왕래하게 되어 간도성의 사정을 다소 알게 되었다.


이때에는 간도성에 비수(匪首)로 유명한 김일성이 있었는데 만주사변 직전에 토벌대에게 사살을 당하자 김일성은 김성주(金成柱)를 곳치니 만주사변이 발발되엇던 그때 즉 十八세 때부터 김일성(金日成)으로 일흠을 곳치엇슴으로 근일에 와서도 간도에 잇던 김일성으로 오해하는 이가 만흔 것이엇섯다.
이때에 정의부의 세력은 점차 쇠퇴하여졋고 남만과 간도 방면에 종종 출몰하던 대도회(大刀會)의 세력이 점점 팽창하여지자 대도회로부터 정의부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하여감에 따라서 남만청총(南滿靑總)도 자취를 감추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됨에 김일성이는 十八세 되던 해 즉 지금부터 十一년 전 十二월 卄八일에 안도현으로 도라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정의부에서는 대도회에서 다소 신임하는 양세봉(梁世鳳)을 부사령으로 임명하야 연락을 취하도록 하엿스나 역시 여의치 못하엿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일성은 압흐로의 의지 관철을 하기 위하야는 의리에 버서난 행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각오하엿엇다.
그리하여 안도현을 떠나서 그때 정의부 계통으로 심룡준(沈龍俊) 외 二十여 명의 무장대가 통화성 류하현 삼원포(通化省 柳河縣 三源浦)에 주둔하고 있는 것을 습격하고 무기(武器)를 압수하얏스니 이것이 김일성으로서는 처음 무력행동을 개시한 것이엇다.
그 후로는 계속적으로 기회를 엿보아 류하(柳河), 무송(撫松), 장백(長白), 몽강(濛江) 등 각 현에 출몰하야 만군 부대를 습격하고 금품과 무기를 약탈하는 一방 때때로 북선과 평북 방면의 국경 지대에까지 침입하여 민심을 소란케 하였고 점점 一파가 증가되어 十一년이 지난 금일에 이르러서는 그 비적단의 수효가 상당히 다수에 달하게 된 것인데 그가 十二개년동안....록림생활(綠林生活)을 계속하는 동안에 자기의 현재.....또한...한바도 업슬수 업고 ...가 맹서한 사람이.............잇는 생활을 하고 잇다할 지라도 세계대세의.......전혀 살피지 못하엿슬것은 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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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도서관 자료
外務省警察史(在滿大使館第一 : 昭和七年八月-九年二月) - 소화 7년은 1932년임.
p.351 : 차용륙 소대장 검거
p.362 제3중대 중대장 심용준(沈龍俊), 제1소대 소대장 고동뢰(高東雷, 雷자는 완전하지 않아 宙자로 착각할만함.)
p.875 : 1932년 가을 제3중대 중대장 심용준, 고동뢰는 없고 제1소대장은 다른 사람임..


1932년도 상황

國史館論叢 第8輯   >   梁世奉 : 朝鮮革命軍 總司令의 硏究(丁原鈺)  >   Ⅲ. 國民府의 組織과 抗日獨立運動   >   3. 朝鮮革命軍의 編成과 獨立戰鬪         


제 1중대 姜玉成 제 2중대 趙化善 제 3중대 沈龍俊
제 1소대 李永杰 제 1소대 張明道 제 1소대 高東宙 : [고동뢰(高東雷)의 착오인 듯]
제 2소대 金相奎 제 2소대 崔允龜(珪) 제 2소대
제 3소대 金永吉 제 3소대 金 모 제 3소대
제 4중대 朴大浩 제 5중대 文學彬
제 1소대 金東善 제 1소대 金禹鍾
제 2소대 供 禹
제 3소대 吳東五

이외 學生徒는 400명이고 新賓 通化·桓仁·撫松·長白·安圖縣에 거주한 朝鮮人 중 20세이상 35세까지의 청년을 모집하여 병력을 보충하였다.

3) 朝鮮革命軍의 抗日獨立


당시 朝鮮革命黨 대표 高而虛와 朝鮮革命軍 총사령 梁世奉의 鐵血的 統制 아래 안으로는 1만 여명의 독립군을 맹렬한 훈련을 하는 동시에 밖으로는 中國義勇軍 총사령 李春潤과 합군하여 朝·中聯合軍을 조직하였다. 中國 義勇軍 2만을 지휘하는 李春潤은 安東省 鳳凰城에서 활동하다가 왜적의 총봉을 피하여 瀋陽 철도를 따라 奉天省 興京縣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이 때 朝鮮革命軍은 본영을 興京縣에 두고 총사령 梁世奉의 명령에 따라서 5·6幕僚와 1개중대로 中國 義勇軍 李春潤부대를 환영하였다.

朝·中 양군을 대표하는 梁世奉과 李春潤 양 장군은 滿洲奪還과 朝鮮의 光復을 위하여 강력한 협동전선을 결성하였다.註 044

滿洲事變 이래 최초의 朝·中共同鬪爭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그로 인하여 몇 달 동안 中國人의 무한한 박해를 당하던 우리 同胞들도 이제는 불안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日本帝國主義의 침략에 대한 抗日戰의 信念을 잃고 躅躇彷惶하던 東北軍閥들도 차츰 계선을 명확히 하여 적극적으로 抗日鬪爭路線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 중에 뚜렷한 항일 노력으로는 北滿의 馬占山, 通化의 唐聚五, 海城의 鄧鐵馬, 濱江의 王以哲, 吉林의 丁超·季杜·張海鵬이 각각 그 지역에서 抗日戰의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朝鮮革命軍 총사령 梁世奉부대와 中國義勇軍 李春潤부대가 합동하여 奉天省 동남 興京路를 막고 있었으며 白頭山부근에는 韓國獨立軍과 金日成부대가 집결하여 鴨綠江·豆滿江 상류에서 出沒無常한 奇妙의 전법으로 매번 倭敵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 때 왜적은 각 지방에서 봉기한 抗日勢力을 근본적으로 소탕하기 위하여 關東軍으로 하여금 전면적 討伐을 개시하였다. 동년 3월 10일 日·滿연합군부대가 奉天으로부터 興京을 향하여 空軍의 엄호아래 진격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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