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11월 18일자 경성일보(京城日報)의 김일성(金日成) 사살 기사 보천보 사건 관련 기록


[경성일보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음.]

1937년 11월 18일자 경성일보(京城日報) :

아래 이미지는 1937년 11월 18일자 경성일보 (京城日報) 조간 7면의 제6사장(第六師長) 김일성(金日成) 사망 기사이다. 맨 밑의 주석에 1933년이라 한 것은 착오이다. 보천보 습격사건 (普天堡襲擊事件)은 1937년 6월 4일 밤에 일어났고, 기사 본문에도 그가 보천보 사건의 장본인이라고 하였다.

사망한 김일성은 함경남도 출신으로 당시 36세(1901년생)였으며, 모스크바 공산대학(共産大學) 출신이라고 하였으니, 1912년 평양 출생의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동명이인이다.

경성일보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원본과 마이크로필름 자료 형태이며, 검색 가능한 DB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일일이 찾아서 읽어봐야 하는 상황으로 보인다.

아래 경성일보 이미지는 클릭하면 확대 된다.

鮮滿國境住民の 苦惱 今ゃ 解消
共産匪 金日成の 死
朝鮮軍當局談
父子二代の 不逞
普天堡 襲擊の 張本

[맨 하단] ...滿洲事變 勃發...東邊道に 歸 王鳳閣 曹國安等の 匪賊團と 聯合し 反滿抗日軍を 起し 國境線を 荒し.つて.た.綠林唯一のインテリ 金日成の 勢力 忽 仲間 首魁に

경성일보 다른 이미지
경성일보 이미지 원본

이명영 교수의 김일성 열전에 위 기사의 일부 번역이 실려 있다.
    이명영(李命英, 1928-2000.06.20), 金日成 列傳 [p.289~290]
    第四章 東北抗日聯軍과 在滿韓人祖國光復會
    第六節 金日成의 죽음
    ...................
    普天堡를 습격함으로써 국내에 널리 알려졌던 東北抗日聯軍 제一路軍 제二軍 제六師長 金日成은 분명히 사살된 것이다. 그는 본명 金成柱, 咸南 태생, 당시 三六세,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金日成의 人的狀況은 그의 죽음을 계기로 세상에 공표된 일이 있다. 金日成이 사살 되었다는 것은 당시 국내 신문에도 보도되었던 일이 있다는 市原의 말에 따라 신문을 조사했더니 1937년 11월 18일자에 金日成의 죽음이 보도된 기사가 있었다. 이 기사는 사살되었다는 사실보도와 함께 金日成의 정체를 밝히는 朝鮮軍 당국의 담화까지 보도하고 있다. 京城日報의 보도는 다음과 같다.
    『...살륙과 약탈을 자행하며 무고한 백성을 괴롭히고 治安을 위협하던.... 지난 13일 滿軍討伐隊는 金日成의 소재를 확인, 이를 공격하여 격전 五시간 끝에 그를 사살하는데 성공하였다..... 普天堡 습격의 장본인이며 綠林의 영웅같이 東邊道 일대를 설치던 金日成이란 어떤 사람인가? 그의 태생은 혹은 咸南이라고도 하고 혹은 平南 출신이라고도 했는데 국경 경찰관의 조사에 의하면 咸南說이 유력하며 그 이상은 판명되지 않는 비적다운 성장 과정이다.
    金日成은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越境 東邊道를 근거로 하여 ○○혁명운동을 일으켜 그의 부친은 수령이 되었었다. ○○운동이 대안에 확대함에 따라 赤色魔가 그들 배후에 나타나 공산 사상을 선동했다. 赤色에 물든 金日成은 一九세 때에 人民戰線의 메카 모스크바에 잠입, 在露 10개년, 그새 공산대학에서 공부하고 더욱 赤色軍 에 입대, 反日운동의 실천자가 되었다.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곧 東邊道로 돌아와 .... 反滿抗日軍을 일으켜 국경선을 휩쓸고 있었다. 綠林 유일의 인텔리(インテリ) 金日成은 곧이어 도당의 수괴에 앉혀졌으며 .... 금춘에는 咸南의 국경 제二선 普天堡를 습격하여 이 때문에 국경선을 사수하던 惠山서원 수명이 희생될 정도였다. 父子二代에 걸쳐 反滿抗日을 계속했던 金日成은 토벌군에 쫓기어 드디어 三六세를 일기로 악몽을 청산, 파란많은 생애의 막을 닫았다.』


    일본어 なかま [仲間] : 1. 한패; 동아리; 동료. 2. 동류; 한무리.

    이 기사는 당시의 金日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활자화된 기록이다. 기사 내용에 국경 경찰관들의 조사에 의했다고 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市原등 惠山事件 수사관들이 피의자들을 통해 확인했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때는 權昌郁(權永壁, 1909-1945), 朴金喆(1912-1967 ?), 朴祿金등이 한창 취조를 받고 있던 때였다. 북한에서는 이 金日成의 죽음을 한사코 日帝의 조작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이치하라(市原, Ichihara)는 함남도경(咸南道警) 고등과(高等課)의 혜산사건(惠山事件) 담당 책임자였던 市原感一 (1896~?, 당시 警部)을 말한다. 이명영은 1971년 2월에 그를 찾아가서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을 들었는데, 이 기사에 나오는 김일성의 신원도 당시 자신이 박록금(朴祿金, 朴录今, 1915.3-1940.10), 권영벽(權永壁=權昌郁, 1909-1945), 박금철(朴金喆, 1912-1967 ?), 마동희 (馬東熙, 1912∼1938) 등 주요 피의자들로부터 알아낸 것이라고 하였다. 위 기사의 김일성 신원은 혜산사건의 주역들이 확인해준 것이니, 북한의 김일성은 죽은 보천보 김일성과 확연히 다른 사람이며, 남의 공을 가로챈 것이 분명하다.

또 경성일보 기사에 6사장 김일성을 "녹림유일의 인텔리"라 한 것도 주목해야 한다. 설사 김일성의 부하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그의 정확한 신원에 대해 잘 몰랐다 하더라도 평소 언행에서 지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금방 드러나므로, 6사장 김일성이 인텔리라는 말이 잘못된 소문이기는 어렵다. 학력이 중학 중퇴 수준에 그치는 북한 김일성을 두고 녹림유일의 인텔리라는 소문이 날 수는 없으므로 6사장은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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